태평양은 넓지 않았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한 망망대해(茫茫大海)를 두고 좁다고 할 수 있는 시대다. 바다엔 약 2만5000개의 섬이 흩어져 있고, 900만여 명의 사람이 산다. 총 14개의 독립국은 이미 배타적경제수역(EEZ)으로 빈틈없이 대양(大洋)을 채웠다. 자연과학적으로 ‘푸른 대양(blue ocean)’이지만, 경제학적으론 ‘레드오션’인 셈이다.
태평양은 결코 ‘태평(太平)한 바다’가 아니다. ‘태평양(Pacific)’이란 이름은 탐험가 마젤란(Magellan)이 순풍(順風)에 대양을 건너며 라틴어로 ‘평화로운 바다(Mare Pacificum)’라고 부른 데서 기원한다. 운이 좋아 순항한 마젤란의 생각과 달리, 실제 바다는 풍랑이 거세다. 제국의 ‘문명’과 ‘달러’는 바다와 섬과 사람을 더욱 거칠게 만들었다.
미국과 일본은 70여 년 전 대양을 무대로 크게 전쟁을 벌였다. 적국(敵國)의 본토 타격을 위한 전진기지로 삼으려 대다수 섬에 공항과 항만을 세우고 도로를 닦았다. 환초섬(atoll)에선 수십 차례 핵(核)실험을 실시했다. 태평양전쟁은 작은 섬나라들을 급속도로 문명화시켰다. 세계대전 이전엔 독일, 영국, 프랑스 등이 바다와 섬을 나눠 가졌다. 그보다 앞서 스페인은 ‘서구(西歐)의 기준’으로 섬들을 최초로 ‘발견’하고 점령했다.
태평양 섬들에 인류가 처음 발을 내디딘 시기는 수천 년 전으로 추정된다. 인도네시아에서 배를 띄우면 특별한 조작이 없어도 피지(Fiji), 타히티(Tahiti), 이스터(Easter)섬까지 떠내려간다. 해류(海流)와 바람 때문이다. 오래전 과거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다른 부득이한 사정으로 배를 탈 수밖에 없었던 라피타(Lapita) 문명인들은 빗물과 생선으로 바다 한가운데서 꽤 오랜 기간을 버틸 수 있었다.
마이크로네시아연방 축(Chuuk)주(州) 공항 전경(사진=ⓒ박흥식)
⊙ 대항해시대와 제국주의시대 지나며 급속도로 문명화… 동서양 문화 뒤섞인 ‘원초적 낙원’
⊙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 두고 新태평양전쟁 벌이는 미·일·유럽·호주 등 강대국들
⊙ 海洋屈起 전략 본격화한 중국, 막대한 자금력 앞세워 태평양 영향력 확장… 미국과 태평양 G2 구도 형성
섬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거나 공격의 대상이 된 이들은 또 배를 탔다. 거대한 바다의 흐름은 무풍지대를 지나 북쪽으로 이동한 그들을 서쪽으로 보냈다. 무역풍을 탄 이들은 캐롤라인제도(Caroline Islands)와 솔로몬제도(Solomon Islands) 등을 거쳐 다시 뉴기니(New Guinea)섬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섬은 그들에게 낙원이었다. 경작 없이도 빵나무(breadfruit)가 자랐고, 섬을 크게 두른 환초(環礁) 안 바다엔 먹을 만한 생선이 가득했다. 섬나라 사람들을 문명의 언어와 사고(思考)로 재단하기 어려운 큰 이유는 이들이 ‘먹고사는’ 문제와는 태생적으로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왜 열심히 일해 돈을 더 벌고 저축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왜(why)”란 질문이 돌아온다. 한국에선 수만 가지 사연이 나오겠지만, 열대 섬에선 마땅한 답을 찾기 어렵다.
좁은 입지 탓에 불거진 근친혼(近親婚)은 지상낙원에 살던 그들이 서로 공격하고 전쟁했던 이유 중 하나다. 고립된 공간에서 유전 결함 확률이 높은 자손을 낳기보다는 섬 반대편이나 다른 섬을 공격해 여자 또는 남자를 납치했다. 대륙의 역사에 비하면 소소한 침투와 약탈에 불과해 보이는 그들만의 전쟁사(史)다. 15세기까지 전혀 문자로 기록되지 못했던 역사는 유럽 탐험가들의 정복이 시작되면서 덧입혀진 문명으로 채워졌다.
제국주의 식민지 정복 전쟁, 제1·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 등을 지나 지금 그들은 평화의 시기 한가운데에 있다. 공식적으론 평온하지만, 실상은 과거보다 더욱 치열하다. 광물·수산자원과 군사거점 확보를 두고 달러를 무기로 한 경제전쟁이 태평양 전체를 무대로 벌어지고 있다. ‘전쟁의 역사’는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월간조선》은 지난 4월 7일부터 총 2주간
한국해양과학기술원(원장 姜正極 박사) 연구팀과 함께 팔라우(Palau), 마이크로네시아연방(FSM·Federated States of Micronesia), 마셜제도(Marshall Islands) 등 적도태평양 국가를 횡단했다.
본지는 총 4회에 걸쳐 14개 섬나라를 모두 심층취재할 계획이다. 한국 언론이 태평양 도서국(독립국) 전체를 현지 취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해외에서도 드문 사례다.
태평양에 대한 오해와 진실
연간 세 차례 열리는 빵나무(breadfruit) 열매와 이를 요리한 음식. 삶은 고구마 맛이 나는 이 열매는 생선과 함께 과거 섬나라 사람들의 주식이었다.
한국인에게 ‘태평양’을 말하면 형형색색(形形色色) 산호초가 가득한 열대 바다와 지상낙원에서의 휴양을 떠올린다. 조금 더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원양어선이 잡는 참치, 새해 첫 일출, 높은 행복지수 등을 말한다. 고개를 돌리면 예전 화장품 브랜드나 조세피난처를 먼저 떠올릴 수도 있다. 알려진 게 별로 없는 마지막 블루오션, 지구상에서 가장 큰 바다를 목전(目前)에 두고 우리는 그만큼 무관심했다.
태평양은 텅 빈 바다가 아니다. 태평양 도서국 전도(全圖)를 펼치면 외딴 섬나라들이 보유한 1800만km2에 달하는 광활한 수역(EEZ)이 대양을 빈틈없이 채운 것을 볼 수 있다. ‘해저의 보물창고’로 불리는 해저 열수광상(熱水鑛床, 금·은·구리·아연 등을 함유한 대규모 광물 덩어리)을 비롯한 광물자원과 참치 등 수산자원이 가득한 바다영토를 두고 강대국들은 이미 전쟁 아닌 전쟁을 벌이고 있다.
도서국들의 국제무대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는 매력이다. 인구 1만명 내외의 투발루(Tuvalu)와 나우루(Nauru)도 UN 총회에서 각자 한 표씩을 행사한다. 총 14표에 이르는 이들의 투표권을 두고 미국, 중국, 일본, 호주 등 강대국들은 막대한 원조를 앞세워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에서 태평양 도서국이 얼마나 생소하게 여겨지는지는 국가명 표기에서부터 알 수 있다. 첫 취재 일정에 포함된 마이크로네시아연방은 출처불명 ‘미크로네시아연방’과 혼용되고 있으며, 마셜제도는 ‘마셜군도’와 ‘마샬제도’ 등으로도 불린다. 마셜제도와 마찬가지로 국명에 ‘제도(諸島·islands)’란 단어가 포함된 쿡제도(Cook Islands)는 지금도 많은 국내 언론이 ‘쿡 아일랜드’라고 쓴다.
세계 3대 스쿠버다이빙 명소로 꼽히는 마이크로네시아연방의 축주(州)는 과거 독일식(式) 표현인 ‘트럭(Truk)’으로 불리거나 ‘추크’, ‘트룩’, ‘트루크’ 등 정체불명의 한글 명칭으로 알려졌다. 키리바시(Kiribati)는 ‘키리바티’로, 바누아투(Vanuatu)는 ‘비누아투’ 또는 ‘바누이투’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태평양 도서국 중 가장 큰 면적과 인구를 자랑하는 파푸아뉴기니(Papua New Guinea)도 서부 아프리카의 적도기니(Equatorial Guinea)와 같은 곳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섬 이름의 기원, 제국의 흔적
마이크로네시아연방 축주의 태평양해양연구센터 앞 해변에 박혀 있는 태평양전쟁 잔해들. 축은 당시 미·일 양국의 최대 격전지였다.
태평양 도서국의 상당수 국명과 지명은 유럽인들이 지었다. 사이판(Saipan)과 괌으로 이어지는 미국령 마리아나제도는 스페인 여왕의 이름을 땄다. 팔라우와 마이크로네시아연방 섬들을 통칭하는 캐롤라인제도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를 의미한다. 독일인들은 파푸아뉴기니 동북부 섬들을 두고 ‘철혈재상’을 위한 ‘비스마르크제도(Bismarck Archipelago)’로 명명했다.
영국의 제임스 쿡(Cook) 선장이 방문했다고 쿡제도란 이름을 붙였고, 길버트 선장이 지나갔다고 ‘길버트제도(Gilbert Islands)’로 불렀다. 길버트제도의 현재 정식국명인 키리바시는 ‘길버트’를 현지인들이 발음한 것이다. 《적도의 침묵》이란 태평양 문명연구서를 쓴 주강현(朱剛玄) 제주대 초빙교수는 “지도와 지명의 제국주의는 이 같은 임의 작명과 분할을 통해 완성됐고, 어디에도 원주민들이 쓰던 고유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남태평양’이란 용어도 지극히 주관적 단어다. 북반구에 자리 잡은 나라들이 ‘남쪽 바다’라고 불렀지만, 캐롤라인제도와 마리아나제도 등 섬들은 모두 적도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지금도 이 섬들과 바다를 ‘적도태평양’이란 말 대신 ‘남태평양’으로 통칭한다.
태평양은 지리와 문화에 따라 크게 멜라네시아(Melanesia), 마이크로네시아(Micronesia), 폴리네시아(Polynesia)로 구분된다. 태평양 14개국 중 서남쪽에 자리 잡은 파푸아뉴기니, 솔로몬제도, 피지, 바누아투가 멜라네시아다. 적도를 중심으로 동서 방향에 널리 퍼진 팔라우, 마이크로네시아연방, 나우루, 마셜제도, 키리바시는 마이크로네시아로 불린다. 동남쪽에 펼쳐진 투발루, 사모아, 통가, 니누에, 쿡제도에는 폴리네시아란 이름이 붙여졌다.
주강현 교수는 “검은 사람들이 산다 하여 멜라네시아, 작은 섬들이 모였다 하여 마이크로네시아, 섬이 많다 하여 폴리네시아로 정했다”며 태평양의 문화권 구분을 “변덕스럽기도 하고 애매모호한 ‘서구의 발명품’”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한번 정해진 ‘태평양 삼분법’은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 서구와 아시아는 물론, 태평양 현지에 사는 사람들도 받아들인 구분법이 됐다.
바다의 열대우림 산호초
마이크로네시아연방 축주를 크게 두른 환초.
태평양을 이해하려면 ‘산호’를 알아야 한다. 깊은 바다에서 화산이 폭발하면 얕은 공간이 생긴다. 플랑크톤으로 떠돌던 산호 유생이 이 공간에 안착하면, 산호는 ‘온 힘을 다해’ 번성하며 영역을 확대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산호의 반복된 생사(生死)는 산호초와 모래를 만든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떠내려 온 야자열매가 이곳에 박혀 싹을 틔우고 나무로 자란다. 작은 섬이 만들어지고, 야자나무가 숲을 이루면 번듯한 섬이 완성된다. 그늘이 만들어지고 바다동물이 쉬어갈 때쯤 사람이 찾아온다.
취재 전(全) 일정을 동행한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의 박흥식(朴興植) 태평양해양연구센터 센터장은 “태평양과 산호초는 따로 떼어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밀접한 관계”라며 “산호가 결국 섬을 만들고, 해양 생물을 모으며, 아름다운 바다를 완성한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산호초 지역은 지상의 열대우림 지역과 비슷한 수준의 ‘생물 생산량’을 내는 곳입니다. 다만 바닷속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간의 관심을 끌지 못했을 뿐이죠. 거대한 산호 덩어리는 바닷속 물고기와 각종 생물의 터전이 됩니다. 대양에서 살아가는 대다수 해양 생물은 생존 기간 중 일부 또는 전 생애를 산호초 주변에서 보내죠. 참치, 거북이, 심지어 고래까지도 산호초 지역 주변에서 서식합니다.”
박 센터장에 따르면 인간의 해양 생태계 평가 기준은 수산업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산호초 지역은 어장이 있는 연안에 비해 그 가치가 높지 않지만, 관광이나 생물다양성 등 보다 넓은 범위에서 계산한다면 높은 경제적 가치를 지닌다.
4000여 종의 어류와 3만 종 이상의 무척추동물 및 해조류가 산호초에 의지해 살아간다. 생태경제학자인 코스탄자(Costanza)는 산호초를 ‘바다의 열대우림’이라고 칭했으며, 연간 3750억 달러의 경제적·생태학적 가치를 제공한다고 했다.
多事多難 태평양
태평양은 텅 빈 바다가 아니다. 태평양 도서국 전도(全圖)를 펼치면 외딴 섬나라들이 보유한 1800만㎢에 달하는 광활한 수역(EEZ)이 대양을 빈틈없이 채운 것을 볼 수 있다.(지도출처: kiritours.com)
태평양 섬나라에선 대다수 주민이 해변의 야자수 그늘에 누워 쉬다가 배고프면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아먹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기 쉽다. 오판이다. 한적한 듯한 섬에도 사건과 사고는 끊이지 않으며, 엘리트 정치인들은 치열한 외교전쟁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말 한 인권 운동가가 미국 ABC 방송에 출연해 키리바시 정부가 북한에 자국 여권을 판매한 적이 있다고 폭로했다. 아노테 통(Tong) 대통령은 지난 3월 이에 대해 당혹감을 표한 바 있다. 태평양 ‘최대 도서국’ 파푸아뉴기니에선 “20세 여성이 소년을 마법으로 죽게 했다”며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여성을 공개 화형에 처했다. 파푸아뉴기니에선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의문사가 발생했을 때 마법을 사용한 사람, 주로 여성을 지목해 처형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오스카 테마루(Temaru) 대통령은 뉴욕 UN 본부를 방문해 자국의 독립국 승인을 공식 요청했다. 사모아 대법원은 아동 성범죄자 신원공개를 추진하고 있다. 솔로몬제도는 지난 1월 릴로(Lilo) 총리가 혼외정사 파문으로 사임위기에 처한 바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 나우루를 보면 ‘태평양의 비극(悲劇)’이 보인다. 여의도의 약 7배 크기 면적에 약 1만명이 사는 이 섬나라는 19세기 말부터 발견된 인광석(燐鑛石) 덕에 큰 부를 누렸다. 독립국이 된 후 고급 비료 원료인 인광석을 팔았고, 세금 없이 교육, 의료, 주택을 국민들에 공짜로 제공했다. ‘전국’ 일주에 20분 걸리는 섬에서 집마다 고급 승용차를 들였다. 하지만 이 부귀영화(富貴榮華)는 2000년대 들어 인광석이 고갈되면서 반전(反轉)됐다. 1인당 국민소득이 2500달러 수준으로 전락했지만, 이미 게을러진 국민은 성인 비만율 90%를 넘는 세계 최고의 ‘뚱뚱한 나라’가 됐다. 경제난에 기후변화로 해수면까지 상승해 국가존망(存亡)의 위기까지 닥쳤다.
나우루는 지난해 말 열린 제18차 UN 기후변화협약(UNFCCC) 당사국 총회에서 지구온난화를 늦추는 합의안을 하루빨리 도출해 달라고 호소했다. 나우루의 경우, 섬에서 가장 높은 지점의 고도가 약 61m 정도다.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수몰 위기’는 나우루만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주간지 《이코노믹리뷰》에 따르면, 최근 온실가스 최대 배출국인 미국에서 기후 소송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으며, 수몰 위기에 놓인 태평양 도서국의 국가재건 요구까지 포함하면 손해배상액이 수조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해수면 상승으로 수몰 위기에 몰린 나라
제주도보다 작은 섬에 약 10만명이 사는 키리바시는 최근 해수면 상승으로 국토보전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 있다. 키리바시 정부는 이를 대비해 피지 사부사부 지방의 토지 6000에이커(약 24km2)를 구입하기로 했다. 마셜제도는 UN 안전보장이사회에 기후변화를 국제평화 및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해 달라고 호소했다. 저지대 도서국에는 기후변화가 주민의 생존을 위협하는 중요한 안보문제라는 입장이다.
태평양 도서국들이 기후변화에 의한 해수면 상승을 이유로 미국 등 선진국에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한 것에 대해 일부 전문가들은 비판적 견해를 보였다. 팔라우에서 만난 한 과학자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환경파괴는 분명 잘못됐지만, 지구온난화로 인해 해수면이 높아져 섬이 수몰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과장된 측면도 있다”며 “환경오염과 해수면 상승의 정확한 인과관계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선진국에 ‘조(兆)’ 단위(달러)의 배상금을 요구하는 행태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수몰’과 함께 태평양의 큰 이슈는 ‘높아진 중국의 위상’이다. 유럽, 일본, 미국이 지배했던 대양을 두고 막강한 경제력을 앞세운 중국이 최근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시대를 맞이해 ‘해양굴기(海洋屈起)’ 전략을 본격화한 중국은 태평양 도서국들에 대한 군사·경제 원조에 자금을 아끼지 않는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의 보도에 따르면, 중국은 2005년부터 약 6억 달러의 차관을 태평양 도서국들에 제공했고, 2009년엔 원조 및 차관 총액이 23억2000만 달러까지 급증했다. 2011년부터는 환경보호 등을 위한 추가 지원 사업을 하고 있다. 작년 8월 쿡제도에서 열린 ‘태평양 도서국포럼(PIF)’에서 힐러리 클린턴(Clinton) 미 국무장관은 중국을 겨냥한 듯 “태평양 지역이 하나의 강대국에 의해 주도되지 않고 균형이 이뤄지도록 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태평양 취재 뒷이야기 -
완행 비행기와 열대 독감
마이크로네시아 섬들을 차례로 운행하는 이른바 ‘완행비행기’. 이번 취재는 ‘섬 건너뛰기(Island hopper)’ 노선에 따라 진행됐다.
취재 여정은 미국 유나이티드에어라인(UA) 항공사가 운항하는 ‘섬 건너뛰기(Island hopper)’ 노선 일정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괌에서 출발해 축(Chuuk), 폰페이(Pohnpei), 코스라이(Kosrae·이상 마이크로네시아연방)와 콰잘렌(Kwajalein), 마주로(Majuro·이상 마셜제도)를 경유, 하와이에 도착하는 이른바 ‘완행 비행기’다. 월, 수, 금요일엔 괌에서 하와이로, 화, 목, 토요일엔 하와이에서 괌으로 간다.
보잉737-800 기종(총 155석)의 항공기에 탄 승객은 각 섬에 도착할 때마다 내릴 사람은 내리고, 다음 섬에 갈 사람은 테러 방지를 위해 자기 짐을 끌어안고 대기하면 된다. 목적지가 아니더라도 담배를 피우거나 스트레칭을 하기 위해 잠시 내렸다 탈 수 있다. 단 미국의 미사일 기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콰잘렌에선 경유 승객 모두 기내에서 대기해야 한다.
이 노선에 사는 주민들에게 비행기 탑승 시각은 고정적이다. 하루 한 번 오는 비행 계획은 일정하나, 연착이 비일비재하다. 원칙에 충실한 미국 기장이 운항시간을 초과했다며 내려버릴 경우, 예비 기장과 승무원을 태운 비행기가 괌에서 올 때까지 승객은 꼼짝없이 대기해야 한다. 한 번 운항이 취소될 경우엔 이틀 후 비행기 좌석을 보장할 수 없어 섬에 갇힐 수도 있다.
열대 지방의 식수와 음식이 낯설어 배탈을 염려했던 기자가 취재 중 앓은 병은 다름 아닌 ‘독감’이었다. 태평양 섬 대다수는 서구에 발견되기 전까진 감기 바이러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근 섬을 방문하는 외지인은 에어컨을 세게 가동하는 호텔방과 더운 바깥의 기온 차 탓에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다. 적도의 열대기후에서도 살아남은 감기 바이러스여서인지, 강한 감기약을 먹어도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열대지방이라 비가 자주 오지만, 우산 쓴 현지인은 찾기 어렵다. 황사와 오염물질로 뒤섞인 한반도의 비와 달리, 대양을 건너며 ‘정화’된 공기와 물은 섬 곳곳에 깨끗한 비를 뿌린다. 젖은 몸은 다시 말리면 된다. 빨래도 마찬가지다. 마당에 세워둔 차량 보닛 위를 가득 채운 빨래는 날씨에 상관없이 어디서든 쉽게 발견할 수 있다.
‘海洋屈起’ 본격화한 중국
중국이 지원한 막대한 자금은 어떤 형식으로 활용될까. 지난 1월 《조선일보》와 중국 동방망(東方網)은, 중국이 피지에 군사·경제 원조를 확대하기 위해 국방부 첸리화(錢利華) 소장과 군사대표단이 피지를 직접 방문, 바이니마라마(Bainimarama) 총리를 접견하고 군사훈련, 차량, 군복, 사무용품과 전국적 규모의 사회기반시설(SOC) 건설 등의 원조에 대해 논의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지난 2월 중국 정부는 기반시설 발전을 위해 380만 달러의 기금을 쿡제도에 전달했다. 비슷한 시기 중국 군부는 파푸아뉴기니 국방부에 200만 달러의 군사 원조금을 지원했다. 파푸아뉴기니는 이를 장갑차, 군용수송기, 군복 구매 등에 사용할 예정이다. 인구 통계가 정확하지 않은 파푸아뉴기니에 최근 1억1000만 달러 규모의 전자주민카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중국의 몫이다. 총 예산 중 7600만 달러는 중국 수출입은행의 차관을 도입했으며, 시스템 구축은 중국 정보통신 기업이 맡는다.
2012년 마리아나 해구 해저 7000m까지 내려간 중국의 유인 해저탐사 심해잠수정 자오룽호(蛟龍號)는 오는 6월부터 동태평양 해역에 투입돼 생물다양성과 광물자원을 탐사하게 된다. 사모아는 관광객 유치를 위해 중국 자본을 끌어들여 카지노를 조성하기로 했으며, 바누아투는 최근 1400여 명의 중국 부호에게 영주권을 판매해 약 430만 달러의 국고 수입을 올렸다.
미국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운데 유럽, 일본, 타이완, 호주, 뉴질랜드 등이 경쟁하던 기존 구도에 중국이 새롭게 진입하면서 ‘태평양 패권’을 두고 ‘G2’ 양국이 경쟁하는 모양새가 됐다. 일본, 괌, 하와이 등 미군의 주요 주둔 지역이 있는 태평양에 중국이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최근 미국에 큰 골칫거리가 됐다는 분석이다. 미국은 지난 2월 하와이에 자리한 태평양사령부의 육군사령관을 3성(星)급에서 4성급으로 격상했다.
복합성으로 얽힌 바다와 섬
태평양은 지구에서 가장 큰 바다다. 단 3대만 있으면 지구 전체를 감당한다는 인공위성도 한번에 전체를 촬영할 수 없을 정도로 넓다. 평균 4000m 수심에 최대 1만1034m 깊이의 해구가 존재한다. 대항해시대 스페인의 탐험가 발보아(Balboa)가 1513년 태평양을 ‘발견’했을 때, 그를 안내한 파나마 원주민들은 ‘위대한 남쪽 바다’라고 설명했다.
‘위대한 바다’는 지금 인류의 공동자산이자 전쟁의 상흔(傷痕)을 가진 곳이다. 핵실험을 위해 원주민은 집단이주를 해야 했고, 대형전함 수십 척이 침몰한 곳은 스쿠버다이빙의 명소가 됐다. ‘최빈국’에 살면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는 섬 주민들은 기후변화와 패권경쟁의 직접적 피해와 수혜를 동시에 받는다. 복합성과 복잡성으로 얽힌 섬나라들을 둘러보고 무위자연(無爲自然)과 반(反)자본으로 단순화한다면, 그것만큼 무책임한 결론이 있을 수 없다. 소설가 김훈(金薰)은 지난해 2월 마이크로네시아연방의 섬들을 여행한 후 이렇게 썼다.
“돌아와서 책상 앞에 앉았다. 연필을 들면 열대의 숲과 바다가 마음속에 펼쳐진다. 숲을 향하여 할 말이 쌓인 것 같아도 말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들끓는 말들은 내 마음의 변방으로 몰려가서 저문다. 숲 속으로 들어가면 숲을 향하여 말을 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태어나지 못한 말들은 여전히 내 속에서 우글거린다. 열대의 숲은 ‘사납고 강력하다’라고 써봐도 숲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다. 열대의 숲은 사납거나 강력하지 않고 본래 스스로 그러할 뿐이다.”
이번 기행(紀行)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곳’을 두고 인문, 사회, 경제, 외교란 이름의 잣대를 들이대 인위적으로 재단한 결과에 불과하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바다와 섬을 누볐지만, 돌아온 것은 이질적인 질문의 연속이었다.
(계속)
월간조선 2013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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