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과학 저술가인 레베카 스클루트(Skloot)가 10년에 걸쳐 추적한 헨리에타 랙스(Lacks)의 삶과 헬라(HeLa) 세포의 '불멸화 과정'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흥미진진하다. 이미 전 세계에 퍼진 세포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때, 젊은 여작가는 여러 난관을 극복하며 흩어진 퍼즐을 모두 끼워 맞췄다. 이 책은 무명의 한 흑인 여성의 삶뿐 아니라, 미국을 포함한 주요국의 의학윤리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1920년 미국 버지니아주(州)의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태어난 헨리에타 랙스는 사실상 조혼(早婚)을 한 후 자녀 다섯을 낳았다. 31세에 존스 홉킨스에서 자궁경부암 판정을 받고 4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녀의 삶은 특별할 게 없지만, 그녀의 암세포는 모두가 놀랄 만큼 빠르게 전이됐다. 담당의사와 연구원들은 본인이나 가족의 동의 없이 세포를 배양했고, 무료로 배포했다.
세계 의학계에 혁명을 불러온 헬라세포는 지금까지 5000만t이 넘게 배양됐다고 한다. 관련 논문이 7만 건이 넘고, 수많은 백신과 치료법의 탄생에 기여했다. 인류는 그녀의 세포에 큰 빚을 졌지만, 헨리에타와 가족의 삶은 비참했다. 막내아들은 돈을 벌기 위해 말라리아 인체실험에 자원했고, 딸은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이 책은 헨리에타의 가족은 물론 전 세계 의학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책 곳곳엔 '헨리에타 랙스의 결정적 순간'이라 할 수 있는 과학보도의 허상을 발견할 수 있다. 길게는 100년에서 짧게는 수십년이 흐른 현재의 관점에선 초등학생도 하지 않을 생각을, 당시 석학들과 언론은 호들갑을 떨며 환호했다. 그 결정적 순간들을 짚어봤다.
레베카 스클루트(Rebecca Skloot)
라듐과 터스키기
역사는 19세기 말까지 돌아간다. 라듐이 처음 발견됐을 때, 주요 언론은 "가스나 전기를 대체할 것이며, 모든 난치병 치료의 길이 열렸다"며 환호했다. 시계회사는 눈금을 빛나게 하려고 염료에 라듐을 첨가했고, 의사들은 멀미에서 중이염에 이르기까지 모든 질병에 분말 라듐을 투여했다.
모든 세포는 라듐에 닿자마자 죽었다. 환자들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암으로 발전할 수 있는 돌연변이를 유발했고, 용량이 크면 화상까지 입혔다. 그러나 라듐이 암세포까지 죽인다는 사실에 존스홉킨스에선 1900년대 초부터 자궁경부암 치료에 사용했다. 책은 당시 존스홉킨스 외과의사였던 하워드 켈리(Kelly)가 라듐을 발견한 퀴리(Curie) 부부를 방문한 것이 계기였다고 설명한다.
켈리는 라듐 한 줌을 호주머니에 넣어 미국에 가져왔다. 1940년대까지 관련 연구자들은 라듐이 침윤성 자궁경부암을 치료하는 데 수술보다 더 안전하고 효과적이라고 보고했다. 물론 헨리에타도 이 치료를 받았다. 당시 헨리에타의 라듐치료를 주관한 의사 브랙(Brack)은 후에 암으로 사망했고, 켈리와 함께 전 세계를 돌며 라듐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전공의도 암으로 사망했다. 라듐을 발견한 마리 퀴리가 장기간 방사선에 노출돼 재생불량성 빈혈(aplastic anemia)에 걸려 사망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은 누구나 위험성을 아는 만행을 당시 석학과 엘리트들은 '최첨단 방사성 치료'로 알았다. 현재는 일상화한 방사성 치료가 100년 후엔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나치의 생체실험과 함께 인류 최악의 실험으로 꼽히는 터스키기 매독 연구도 헨리에타의 삶과 묘하게 맞닿아있다. 1930년대 터스키기 대학의 연방보건부 연구원들이 매독 감염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매독이 사람을 어떻게 죽여가는지 관찰한 이 실험은 흑인 남성 수백명의 죽음을 방관했다. 1970년대까지 알려지지 않았다가, 후에 모든 정황이 공개되면서 큰 사회적 파문을 불러왔다.
헨리에타가 죽은 후인 1950년대 과학자들은 터스키기 대학에 '헬라세포 공급센터'란 이름의 세포공장을 세웠는데, 수백만 명의 미국인, 즉 대부분 백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흑인 여성에게서 나온 세포를 연구했다. 같은 시간, 같은 대학 캠퍼스에서 주 정부 관리들이 악명높은 터스키기 매독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적 아이러니다.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The Immortal Life of Henrietta Lacks)
불멸의 닭
모든 위대한 과학적 발견이 그렇듯, 세포배양도 그 시작은 현재 기준으로 상당히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허무하다. 책은 세포배양의 역사가 1912년 1월 17일 뉴욕 록펠러 대학의 외과의사 알렉시 카렐(Carrel)의 '불멸의 닭 심장세포'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설명한다. 20세기 이전부터 시작된 세포 배양 시도가 모두 좌절됐지만, 카렐은 닭의 심장세포 배양에 성공했다.
카렐은 이미 혈관봉합술을 고안하고 장기이식을 발전시킨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는데, 언론은 이를 닭 심장과 연결해 보도했다. 부풀려진 연구 성과는 이미 걷잡을 수 없었다. 당시 신문들의 기사 제목은 이랬다.
"카렐의 새로운 기적, 노화를 막을 방법을 제시하다! 과학자들이 불멸의 닭 심장을 길러내다! 죽음을 피할 길이 있을지도"
이 기사에 '불멸의 닭' 대신 '줄기세포'와 같은 다른 단어를 넣으면 어떨까. 100년 전 사례가 현재와 묘하게 겹친다. 우리가 현재 매일 신문과 방송으로 접하는 최고의 연구성과가 미래엔 과연 어떤 관점에서 다시 쓰이게 될까.
당시 과학자들은 카렐의 닭 심장세포가 "20세기 가장 위대한 진전"이라고 했다. 세포배양이 음식 섭취와 성행위는 물론 바흐의 음악, 밀턴의 시, 미켈란젤로의 천재성 등 모든 비밀을 풀어줄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잡지들은 '젊음의 묘약'인 배양액에서 목욕하면 영원히 살지도 모른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빛이 배양 세포를 죽일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진 연구원들은 마치 KKK의 복장 비슷한 옷을 입고 암실에서 실험을 했다.
메시아로 불리던 카렐은 사실 인종개량론자였다. 장기이식과 생명연장은 '열등한' 유색인종에게 '오염'된 백인종을 보존하는 방법이었다. 훗날 그는 인종개량을 추진한 히틀러를 칭송했다고 한다. 그는 텔레파시와 투시력을 믿는 신비주의자였고, 가사 상태의 인간을 몇 세기 후에 부활시킬 수 있다고 했다.
많은 과학자가 그의 비과학적인 면모를 비판했지만, 그의 기이한 행동은 언론의 광적인 취재경쟁을 불렀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성관계가 정신을 고갈시키기 때문에 부부관계를 이미 많이 한 부인이 남편을 더이상 유혹해선 안 된다"는 카렐의 기사를 실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자라면 아마도 전체 세포들의 부피가 태양계보다 크게 될 것"이라는 카렐의 발언은 "배양세포들이 이미 지구를 덮고도 남을 것"이란 기사로 보도됐다. 영국의 한 신문은 "한걸음에 대서양을 건널 수 있을 만큼 큰 수탉으로 자랄 수도 있다. 너무도 거대해서 둥근 지구 위에 앉아 있으면 마치 풍향계처럼 보일 것"이라고 했다. "미국 헌법이 모든 인간의 평등을 보장한 것은 오류"라는 그의 책은 200만부 이상이 팔렸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그는 백인의 영웅이었다.
매년 새해 첫날에 뉴욕의 한 신문사는 카렐에게 전화를 걸어 세포 상태를 확인했다. 그가 닭 세포를 최초로 배양했다는 1월 17일이 되면, 그의 동료들은 배양세포 앞에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신문과 잡지는 수십 년 동안 "닭 심장세포, 10년간 생존하다, 14년간 생존하다, 20년간 생존하다"와 같은 재탕 기사를 내보냈다.
실제로 그의 닭 심장세포 연구 성과가 어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생존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란 의혹이 제기됐지만, 카렐 사망 2년 후 연구 보조원이 유명한 닭 심장세포들을 쓰레기통에 버려 영원히 미확인으로 남았다.
가이의 고백
헨리에타는 1951년 10월 4일, 오전 12시 15분에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말기 요독증이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헬라세포를 매주 수조 개씩 대량생산하는 공장 건립이 시작됐다. 소아마비 연구로부터 시작된 세포 연구는 여러 단계를 거쳐 핵폭탄이 어떻게 세포를 파괴하는지, 세포가 심해 잠수나 우주비행 같은 극한의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등의 연구까지 확장됐다.
헬라 세포를 불멸하게 한 장본인이자 주인공인 조지 가이는 헨리에타 생전에 그녀 앞에서 "당신의 세포가 당신을 영원히 살게 할 것"이라며 "수없이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세포 배양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달하자 지쳐버린 가이는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한다.
"누군가는 작금의 상황에 대해 바른말을 할 때가 온 것 같네. 비단 말하는 그 순간뿐일지라도 '세상이 온통 조직배양과 그 가능성에 미쳐 있다'고 밝혀야만 해. 나는 조직배양을 둘러싼 저 떠들썩한 호들갑 속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게 몇 가지만이라도 있길 바라네. 무엇보다도 모든 게 좀 진정됐으면 좋겠어."
가이의 발언에서 '조직배양' 대신 '줄기세포'란 단어를 넣으면 60년이 지난 현재에도 이 말은 유효하다.
세포 주인의 이름이 유출된 것도 언론의 과도한 취재 때문이었다. 1950년대 많은 언론이 그녀의 이름을 공개했지만, 틀린 정보가 많았다. 실명 공개를 막으려 했던 가이는 헨리에타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해 굳이 정정을 하지 않았다. 1954년 5월 14일 <콜리어스>란 잡지에 실린 기사 내용 중 일부다.
"스크린으로 헬라세포의 분열을 지켜보면서 꼭 영생을 엿보는 것만 같았다. 지금 희망찬 새 시대의 문턱에 서 있다. 이제 인류는 암, 정신질환, 그리고 불치로 알려진 거의 모든 질병에서 해방될 것"
언론의 호들갑은 계속됐다. 1960년대 의사들이 헬라세포로 만든 백신을 정맥주사로 투여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소송도 제기됐다. 신문과 잡지는 "환자들, 암세포인 줄도 모르고 주사를 맞다! 과학계 전문가들이 암세포 주사로 의료 윤리를 내팽개치다!"라며 비판했다. <사이언스>는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의학계의 윤리문제에 관한 가장 뜨거운 대중적 토론"이라고 지적했다.
헬라세포는 대중화 단계에까지 올라섰다. 책은 1960년대 헬라세포를 두고 벌어지는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과학자들은 헬라세포가 놀라운 생존력 때문에 싱크대 하수구나 문고리에서도 살아남을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이미 헬라세포는 어디에나 있었다. 일반 국민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이란 잡지의 '스스로 해보기' 코너에 실린 설명서만 있으면 얼마든지 집에서 헬라세포를 기를 수 있을 정도였다. 인간이 최초로 우주궤도에 진입하는 순간에도 헨리에타의 세포는 우주선에 타고 있었다."
반성문
1965년, 영국 과학자들이 헬라세포와 생쥐의 세포를 융합해 최초의 인간-동물 잡종세포(hybrid cell)를 만들어냈다. 과학자들은 열광했고, 무지한 언론은 또다시 선정적인 보도를 쏟아냈다.
"인간-동물 잡종세포가 실험실에서 자라고 있다. 다음엔 나무인간이 나올 수도. 과학자들이 괴물을 창조하다!"
조지 가이는 1970년 11월 8일 사망했다. 자신이 평생 싸워온 그 질병, 암 때문이었다. 1976년이 되자 세포주의 소유권에 대한 논쟁이 본격화했다. 자신의 세포가 '모(Mo)세포'란 이름으로 상업화된 사실을 안 혈액암 환자로 존 무어(Moore)는 소송을 시작했고, 당시 미국 신문들은 이런 머리기사를 뽑아냈다.
"세포에 대한 소유권 분쟁이 복잡한 논쟁을 일으키다. 누가 환자의 세포에 대한 권리를 가져야 하는가? 누가 당신한테 내 비장을 팔아도 좋다고 했습니까?"
재판이 진행되면서 "세포는 환자의 고유재산", "환자의 조직을 이용하는 것은 의사의 권리"란 기사들이 오갔다. 이후 수십 년간의 논쟁 끝에, 누구도 환자의 조직을 동의 없이 가져갈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어찌 보면 당연한 상식을 찾아내는 데 100년 넘게 걸린 셈이다.
이 책은 헨리에타 랙스의 삶과 함께 과학을 보도하는 언론의 허상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의학계에 던지는 메시지뿐 아니라 언론계가 되돌아봐야 할 의제를 담아냈다. 한 편의 반성문을 읽고 쓰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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