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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취재 / 태안, 기름 유출사고 그 후

사회

by 김정우 기자 2010. 6. 2.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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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월 간 4명 自殺… 보상은 미뤄지고 살기는 어렵고…

⊙ 태안 주민과 삼성중공업, 無限책임과 有限책임 법적 공방
⊙ 삼성중공업, “이미 피해보상과 별개로 기금 1000억원 출연”
⊙ 주민 측 소송대리인 “주민 돕겠다는 특별법 때문에 오히려 고통”
⊙ 국토부 “국제협약에 따라 보상절차 진행…객관성과 합리성 도모”
⊙ 先보상 後협상한 스페인 vs. 국제기금 査定만 기다리는 한국

朴熙錫 月刊朝鮮 인턴기자

충남 태안군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자원봉자사들이 바다에서 떠낸 원유를 한곳에 모으고 있다.


지난 2월 26일,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가 피겨스케이팅 금메달을 땄다. 곳곳에서 환호성이 울렸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같은 날 슬픔과 분노의 눈물을 흘리는 곳이 있었다. 충남 태안이다. 이날 오전에 있었던 전(全) 피해민 손해배상대책위원회(이하 전 피해민 대책위) 위원장 성정대(成正大)씨의 자살 때문이다.
 
 성씨는 “2007년 태안해역 유류피해로 처음 시작한 양식 사업의 주기(週期)가 깨지고 채무(債務)만 늘어간다”는 비관과 함께 “다시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속하고도 원만한 배상이 이루어지길 촉구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2008년 1월, 태안에서는 사고로 인한 좌절과 피해로 인한 생활고로 열흘이 안되는 기간 동안 3명이 연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성정대씨가 자살했지만, 세간의 이목(耳目)은 이미 태안을 떠나 있었다.
 
 
 전쟁터만큼 비참했던 2007년 12월의 태안
 
2008년 1월 23일 태안 주민들이 삼성본관 쪽으로 이동하다 제지하는 경찰과 몸싸움을 하고 있다.

 지난 5월 12일, 태안 기름유출사고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희생자 가족들이 삼성중공업과 대한민국 등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소장에서 밝힌 청구취지는 “피고(정부, 삼성중공업, 허베이 스피리트사) 등은 연대하여 각 원고에게 각 금 5억원 및 이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라”는 것이다.
 
 30개월 전, 우리나라는 사상 최악의 환경재난을 겪었다. 2007년 12월 충남 태안에서 발생한 허베이 스피리트(Hebei Spirit)호 유류오염 사고다. 그것은 인재(人災)였다. 삼성중공업 소속 크레인 부선이 허베이 스피리트호와 충돌해 7만8000배럴(1만900t)의 기름이 바다로 흘러나온 사건이다. 만리포면에 거주하는 명한영(53)씨는 사고 당시를 떠올리며 “아침에 일어났는데 기름 냄새가 진동해서 보일러가 터진 줄 알았다”며 “영화에서 보던 전쟁터보다 더 비참했다”고 전했다.
 
 해안선 375km, 육지 70.1km가 오염됐고, 태안을 비롯한 충남·전남북 지역 11개 시군이 피해를 입었다.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돼 성금 389억원이 모였고, 전국 각지에서 온 120만 자원봉사자들이 방제작업에 참여했다. 빠른 회복에 전 세계는 감탄했다. ‘태안의 기적’이었다. 30개월이 지난 지금, 태안에서 사라진 기름 자리에 ‘사람의 눈물’이 채워졌다.
 
 
 “보상완료돼 다시는 이런 인터뷰 안 했으면”
 
2002년 11월 피로파괴로 침몰한 프레스티지호.

 지난 4월 29일, 기자는 태안군 소원면 의항2리로 향했다. 유출지점 바로 앞 해안가였다.
 
 부락 뒤편 산비탈 외진 집에 가재분(賈在芬·62)씨가 살고 있었다. 가씨는 태안 사고 이후 처음으로 자살한 이영권씨의 부인이다.
 
 가씨는 “5월 2일이 막내아들 결혼식”이라며 “식장에 혼자 들어가 앉아 있을 걸 생각하면 막막하다”고 눈물부터 훔쳤다.
 
 고(故) 이영권씨는 소원면 의항2리에서 50년 동안 맨손어업에 종사했다. 가재분씨도 20세에 시집와서 줄곧 맨손어업을 해 오던 도중, 빚을 얻어 굴 양식을 시작했다. 한해 3000만원을 버는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름유출 사고로 굴은 전부 폐사(斃死)했다. 이씨는 “굴 수확을 하면 결혼식을 올려주겠다”던 막내아들과의 약속도 지켜주지 못하게 됐다. 이씨의 막내아들 운규씨는 형편이 여의치 않아 식을 올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한 채 살고 있었다.
 
 이씨는 2007년 12월 28일 해양수산부 주최 주민설명회에서 “무허가 굴양식은 보상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됐다. 이씨의 굴 양식장은 무허가였다. 언론에서는 “태안 바다가 회복되는 데 100년이 걸릴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보상은 요원(遙遠)하고 다시 굴을 깔 수 있다는 희망도 없어졌다.
 
아들의 결혼식 피로연 날, “오늘도 산소에 가서 펑펑 울었다”는 가재분씨.

 이씨는 사고 전날 술을 많이 마셨다. 가재분씨에 따르면 이씨는 다음 날인 2008년 1월 10일 아침 8시에 막내아들 운규씨에게 전화를 해 “나 보려면 지금 집에 들어와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운규씨가 집에 도착했을 때 이씨는 이미 음독(飮毒)을 한 뒤였다. 이씨는 부인과 삼 남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 채 눈을 감았다.
 
 이씨의 장례식은 1월 14일 태안군청 광장에서 군민장으로 치러졌다. 태안 주민 1만여 명이 참석해 이씨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충경 의항리 어촌계장은 조사(弔辭)에서 “누가 이영권 선생을 죽였느냐”며 “6만 태안군민 앞에 정부와 삼성은 엎드려 사죄하라”고 외쳤다.
 
 이씨의 장례식이 끝나고 태안주민들 사이에서 돈 소문은 유족들에게 더 큰 상처를 줬다. 가재분씨는 “그런 말들을 듣고 가슴이 먹먹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장례식을 치른 다음에 사람들이 ‘들어온 부조금만 수억원이다’ ‘삼성...

계속...

월간조선 2010년 6월호 (기사 全文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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