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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엔 진실도 없고 화해도 없었다”

사회

by 김정우 기자 2010. 8. 9.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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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말로 활동 마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委

“진실화해위엔 진실도 없고 화해도 없었다”

⊙ 4년여간 1만1172건 조사완료… 현대史 이면의 그늘 끄집어내
⊙ 위원들 반대의견에도 ‘문세광 사건’ 직권조사 결정… 2년 반 뒤 결국 조사중지
⊙ 고창사건, 사실과 다른 발표로 전면 재조사 실시
⊙ 일부 편향된 조사관들, 입맛대로 조사하고 자유게시판에선 위원회 공개 비난
⊙ “‘일부 위원들이 재심권고란 파생상품 만들어 내 민변 먹여 살리고 있다’는 풍문 돈다”
    (申志鎬 의원)


2007년 7월 10일 오후,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전원위원회 6번째 안건이 발표됐다. 주제는 ‘8ㆍ15 저격사건’, 1974년 8ㆍ15 광복절 기념 행사장에서 발생한 육영수(陸英修) 여사 저격사건에 대한 조작 의혹을 조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을 왜 조사해야 하나. 이유가 뭔가.”
 
 “육영수 여사가 그 자리에서 숨지지 않았다면, 조작의혹으로 볼 수 있겠지만, 사람이 죽은 사건을 조작이라고 조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정권이 좋고 권력이 좋고 정치가 좋아도, 자기 마누라를 쏴 죽이라고 하는 대통령은 없다. 잡동사니 루머와 같은 의혹에 대해선 신중을 기해야 한다.”
 
 위원 대부분 사건 조사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당시 재적 위원 15명 중 한나라당 추천 3명을 제외한 12명이 여권(대통령, 열린우리당, 민주당, 대법원장)의 지명 또는 추천으로 임명된 위원이었지만, 이처럼 인터넷에서 떠도는 수준의 황당한 의혹에 대해서는 지지하지 않았다.
 
 이날 제기된 의혹은 ▲저격범 문세광이 비표 없이 행사장 출입이 가능했다는 점 ▲한일(韓日) 수사당국의 수사결과 차이 ▲격발자, 탄착점, 탄두의 개수, 감정여부 등을 근거로 했다. 외부적인 요인은 사건 발생 전일인 8월 14일이 ‘김대중(金大中) 납치사건 수사종결’ 발표일이라 일본의 거센 반발이 예상됐던 시점이란 상황이었다.
 
 <월간조선>이 단독 입수한 회의록에 따르면 이 사건은 토의의 흐름상 거의 기각(棄脚)으로 결정되는 듯했다. 그런데 김갑배(金甲培) 상임위원이 나서 발언함으로써 지금까지의 논의 결과가 일거에 뒤집힌다. 김 상임위원은 “3소위원회에서 나온 결과들은 50년, 100년 후에도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사건의 경우에는 다른 사건과는 달리 더 많은 확정적인 자료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조사를 해서 역사적으로 인정받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그 점에 관해서는 조사관과 소위에서도 그렇게 논의를 할 것으로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회의록은 김 상임위원의 이 말이 있자 곧바로 송기인(宋基寅) 위원장이 “원안대로 결정하겠다”며 10여 분 동안의 안건에 대한 회의를 종료했다고 적고 있다.
 
 다음 날 진실화해위 홈페이지를 통해 ‘8ㆍ15 저격사건’을 직권조사하기로 했다는 보도자료가 알려졌다. 사실상 육영수 여사의 저격에 특정 세력의 음모가 있었다는 내용의 조사를 개시한 것이다.
 
 이 조사는 2년 반 넘게 ‘조사중’이었다. ‘특정 세력의 음모’는 애초부터 황당한 것이었기에 확인될 리가 없었다. 진실화해위는 결국 시간만 끌었다. 정권이 바뀌고 2010년 상당수 위원이 “황당한 주장”이란 이유로 ‘조사중지’ 결정을 내렸다.
 
 이날 위원 중 유일하게 조사에 대해 긍정적이었던 김갑배 상임위원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출신의 변호사로, 열린우리당의 추천으로 진실화해위 출범 때 상임위원(차관급)에 임명됐다. 조사를 최종 결정한 송기인 위원장(장관급)은 노무현(盧武鉉) 전(前) 대통령의 ‘정신적 지주’로 알려진 인물이다. 12:3이란 수적 열세에 선 한나라당 추천위원들은 반대의견을 개진했을 뿐이었다.
 
 
 ‘노무현式 과거사 정리’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역대 위원장. 왼쪽부터 현재 위원장인 이영조 경희대 교수, 2대 위원장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 초대 위원장 송기인 신부.

 진실화해위가 지난 6월 30일 공식 조사활동을 종료했다. 2005년 12월부터 1년간 접수한 1만860건의 사건에 대해 2006년 4월 25일 첫 조사를 시작한 후 4년2개월 만에 총 1만1172건(분리사건 274건, 직권조사 38건)의 사건을 조사 완료했다. 진실화해위는 앞으로 6개월 동안 종합보고서 작성 등을 마무리한 뒤 연말에 해산할 예정이다.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에 따라 일제강점기, 6ㆍ25전쟁 전후, 1945년 8월 15일부터 권위주의 통치시기까지 항일독립운동과 민간인집단희생 등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역사의 진실을 밝힌다는 목적으로 출범한 진실화해위는 4년여 동안 좌ㆍ우파 간 이념 대립과 피해자 유족 및 국가기관과의 갈등으로 많은 정치적, 역사적 논란을 일으켜 왔다.
 
 초기 위원회 구성부터 말이 많았다. 15명의 위원 중 8명이 여권(與圈) 추천(청와대, 열린우리당 각 4명)이다. 나머지 7명은 대법원장 3명, 한나라당 3명, 민주당 1명 추천으로 이뤄져 위원들의 이념 편향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한나라당 유기준(兪奇濬) 의원 등은 송기인 위원장에 대해 “노 대통령의 측근으로 코드 인사 논란이 인다”며 자진사퇴를 요구했고, 일부 언론에선 코드인사 지적과 함께 “‘노무현식(式) 과거사 정리’가 시작됐다”고 보도했다.
 
 좌파단체는 한나라당이 추천한 3명의 위원이 모두 17대 총선 낙천자들이라며 ‘정치권 인사’를 비판했다. 또 “‘보수신문들’이 칼럼 등을 통해 대통령과 여당이 추천한 위원의 전력을 문제 삼으며 이념공세를 하고 있다”는 비난도 제기했다. 출범부터 화해가 아닌 불화(不和)로 시작한 것이다.
 
 진실화해위 출범 하루 전인 2005년 11월 30일, 한나라당은 “진실화해위...

계속...

월간조선 2010년 8월호 (기사 全文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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