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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재산 간첩단 총책 "출소하면 국가유공자 될 것" 호언장담

정치·북한

by 김정우 기자 2011. 9. 19.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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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추적] 北 225국 지령 ‘왕재산 간첩단’ 사건 조사 뒷이야기

⊙ 민변 변호 후 태도 바꿔 조사ㆍ참관 거부, 인권委 제소, 묵비권 행사 등 조사불응
⊙ 수사관에겐 “검찰에 가면 한마디도 안 할 자신 있다”, 면회 온 가족에겐 “별것 아니니 내년쯤 나갈 것”
⊙ 인천지역책 임모씨, 아버지는 6ㆍ25 참전 상이용사, 아들은 간첩 혐의 구속
⊙ 민혁당 사건 후 12년 만에 적발한 20년 장기 암약 지하당 反국가단체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왕재산

지난 8월 25일 서울중앙지검 이진한 공안1부장이 간첩단 ‘왕재산’ 사건에 대한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북한 노동당 225국의 지령을 받고 지하당 왕재산을 구축해 간첩행위를 한 혐의로 구속된 총책 김모(48)씨 등 관련자 5명이 조사에 참관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묵비권을 행사하는 등 수사에 제대로 응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총책 김씨는 수사관에게 “출소하면 국가보훈 유공자가 될 것이다” “판사가 우리에게 무죄를 선고할 것 같다”고 호언(豪言)하는 등 의기양양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한다.
 
  공안당국에 따르면, 김씨는 면회 온 가족에게 “별것 아니니까 내년쯤 나가게 될 것”이라고 장담하고, “묵비가 힘들지 않으냐”는 수사관의 질문엔 “여기 구속돼 보니, 몸은 여기 있어도 정신은 좋은 데 가서 놀 수 있다”며 “검찰에 가면 정말 한마디도 안 할 자신이 있다”고 답했다.
 
  다른 한 피의자는 조사 중 수사관이 성명과 주소 등 인적사항을 묻자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며 변호인과 함께 눈을 감고 잠자는 자세를 취했다.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는 수사관의 말에 “피의자가 수사관 신문에 응해야 한다는 법 조항이 어디 있느냐”며 따졌다.
 
  일부 피의자들은 “조사실에 나가서 조사받기 싫다. 구치소에서 나가지 않겠다”며 버텼고, 교도관이 강제로 신병을 이송하려 하자 “문제 삼겠다”며 교도관에게 ‘경고’했다. 또 조사실에선 “수사관과 함께 있는 관계로 휴식을 취할 시간이 없어 인권침해를 당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수사관을 제소했다.
 
 
 
민변 변호인 만난 후 태도 돌변
 
  ‘왕재산 사건’은 주사파 운동권 출신 등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지하당을 구축해 약 20년 동안 간첩 활동을 해오다 적발된 사건으로, 1994년 구국전위(救國前衛) 사건과 1999년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사건 이후 12년 만에 발각된 반(反)국가단체 사건이다.
 
  검찰은 ▲총책 김씨와 인천지역책 임모(46)씨가 간첩활동을 하면서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아 보상받은 점 ▲서울지역책 이모(48)씨가 국회의장 비서관 근무와 공천 신청 등 정치권 깊숙이 침투한 점 ▲인천 지역에 유사시 무장봉기 등 극도의 혼란을 조성해 혁명의 교두보로 활용하려 한 사실 등을 근거로 남한 사회가 당면한 심각한 안보현실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공안당국에 따르면, 왕재산 조직원들은 사건 초기 자신의 주거지와 사무실 등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집행되자 순순히 수색에 응했다. 수사관이 압수한 물건에 대해 확인을 요구할 때도 별 저항 없이 협조하는 태도를 보였다.
 
  총책 김씨는 자신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영장이 나올 줄 알았다”며 담담하고 여유 있는 반응을 보였다. 구속 후엔 “모든 것을 정리할 생각”이라며 수사에 협조할 뜻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수사가 진행되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등 변호인의 조력을 받게 된 후 이들은 묵비권을 내세우며 신문에 대한 답변을 거부하는 등 태도와 입장을 바꿨다. 스스로 서명하고 확인했던 압수 자료에 대해서도 개봉 시 내용확인을 위한 참관 요구를 거부했다. 디지털 증거의 사본 복제를 위한 현장 참관 때도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는 등의 방법으로 불응했다.
 
  공안당국은 수사 절차상 흠을 잡으려는 의도라고 판단해 관련 사항을 모두 비디오로 촬영하고, 외부의 디지털 포렌식(forensicsㆍ증거 수집 및 분석) 전문가를 조사실에 초빙해 증거물 복제 및 분석을 진행했다.
 
  1980년대 주체사상 교범인 ‘강철서신’의 주인공 김영환(金永煥)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총책 김씨가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7월 초 국정원으로부터 묵비권을 행사하는 김씨를 만나 설득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김씨가 입을 열지 않을 걸 알았기 때문에 거절했다”면서 “내가 민혁당에 있을 때 직접 보안교육을 철저히 했기 때문에 그가 묵비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父는 상이용사, 子는 간첩 혐의
 
  일부 좌파 매체는 최근 “사건 수사 중 공안당국이 피의자에게 가혹행위를 하고 방어권을 침해했다는 논란이 있다”며 국정원 청사 출입 당시 변호사 가방 추가 검색과 관련한 승강이를 소개하는 등 인권침해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공안당국은 이에 대해 “국정원은 국가보안목표 가급 시설로 외부인 출입 시 보안검색대를 통과하는 것이 규정인데, 변호인들은 ‘검색대 통과 요구는 변호인의 조력권 침해’라고 주장한다”며 “검찰청, 법원을 출입할 때는 검색대를 통과하면서 굳이 국정원에서만 통과를 거부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변호인들은 구속된 피의자 접견 등 자신들이 필요한 시점엔 검색대 통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다가 불구속 피의자나 참고인과 동행할 땐 ‘절대로 검색대를 통과할 수 없다’고 버티는 이중적 행태를 보였다”며 “변호인들은 현재 이 문제로 법원에 준항고(準抗告)를 제기한 상태”라고 밝혔다.
 
  인천지역책 임씨의 경우 아버지가 6ㆍ25전쟁에 참전한 상이용사임이 밝혀졌다. 아버지는 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 총탄을 맞고 대퇴부에 관통상을 입어 국가보훈대상자로 지정되고, 아들은 북한으로부터 지령을 받아 간첩행위를 한 혐의로 구속된 특이한 경우다.
 
  총책 김씨는 구속 당시 담담한 태도로 응했지만, 한 피의자는 구속영장 발부 사실이 알려지자 “에이 ××”이라며 의자를 발로 걷어찼고, 나머지 피의자들은 총책 김씨가 다량의 증거를 갖고 있었던 사실을 알고 김씨를 크게 원망했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왕재산 조직원들의 치밀한 해외 접선 방식도 새롭게 드러났다. 조직원들은 매년 김정일(金正日) 생일과 노동당 창당일 등 주요 시기마다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 등 접선장소를 수시로 바꿔가며 총 34차례 북한 225국 공작조와 접선해 활동 경과를 보고하고 지령을 받았다.
 
  공안당국에 따르면, 이들은 해외로 출국하기 전 공항 대합실을 배회하며 미행 감시 여부를 확인하는 등 ‘교범’대로 행동했다. 조직원 2명이 접선 목적으로 공항을 이용할 땐 도착 후 재빠르게 입국 심사대로 이동해 각각 다른 심사대에서 심사를 받고 통과했다. 그리고 곧바로 화장실에 들렀다 나오면서 주위를 세밀히 살펴본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택시 승강장으로 이동했다. 택시 이용도 먼저 한 명이 타고, 나머지 한 명은 후방 미행 여부를 면밀히 관찰하면서 한동안 대기한 후 승차했다고 한다.
 
 
  김씨,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남조선 혁명 교시받아
 
  접선장소도 신중을 기했다. 북한 측 공작 상부선은 항상 미리 다음 접선장소를 물색해 놓은 다음 접선 때 대상자에게 차후 접선장소를 알렸다. 접선 시점 약 1개월 전에 암호통신을 통해 접선장소를 하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국에 따르면, 이들은 호텔에 도착하면 체크인 후 곧바로 호텔 주위를 정찰했다. 이후 다시 호텔에서 대기하다가, 약속한 접선시각 수십 분 전 밖으로 나와 호텔 근처 유동인구가 많은 백화점에 들어가 반대편 문을 이용, 북한 측 상부선이 미리 탑승해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합승해 접선장소로 이동했다.
 
  접선장소 도착 순서는 항상 북한 측 상부선이 먼저였다. 국내 조직원은 연락 공작원의 안내를 받아 접선장소에 도착하며, 접선이 끝나면 국내 조직원이 먼저 현장을 떠나고 20~30분 지난 후 상부선이 떠났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는 지난 8월 25일 “왕재산은 북한의 ‘남조선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간첩활동을 해온 전형적인 반(反)국가단체”라며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검찰과 공안당국의 자료에 따르면, 1980년대 대학생 시절 주사파로 활동했던 총책 김씨는 1990년대 초 북한 225국(당시 사회문화부)에 포섭돼 북한으로부터 ‘관덕봉’이란 대호명(對號名)을 부여받았다. 대호명은 간첩이 보안유지를 위해 이름 대신 쓰는 명칭으로, 북한은 일정한 절차와 형식을 거쳐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고정간첩에게 공작임무와 함께 이를 수여한다.
 
  김씨는 1993년 8월 26일 김일성(金日成)을 만나 “남조선 혁명을 위한 지역 지도부를 구축하라”는 접견교시와 “김 부자(父子)의 혁명사상과 위대성을 보급ㆍ선전하고 합법적인 무역 공간을 통해 조국과 연계연락을 실현하라”는 등 ‘5대 과업’을 받았다.
 
 
  “장군님이 하라는 대로”
 
‘왕재산’ 간첩단이 스테가노그래피 기법으로 은닉한 지령문(왼쪽)을 평문으로 추출한 내용(오른쪽). (서울중앙지검 제공)
  2001년 3월, 김씨는 북한이 ‘김일성의 항일유적지’로 선전하는 함경북도 온성의 산(山) 이름을 따 ‘왕재산’이란 지하당을 결성하고, 같은 해 11월 북한체제 선전 목적의 벤처기업 ‘코리아콘텐츠랩’과 2002년 6월 합법적 간첩활동을 위한 위장기업 ‘지원넷’을 설립해 활동 토대를 구축했다. 김씨의 대북 보고문과 USB 메모리 암호는 김일성 접견날짜인 1993년 8월 26일을 상징하는 ‘93826’과 ‘a93826z’ 등으로 정했다.
 
  공안당국은 왕재산 조직원들이 조선노동당 강령과 규약에 따라 주체사상을 지도사상으로 삼고 “김정일의 영도 아래 남조선혁명을 수행”하는 ‘조선노동당의 지역당’, ‘남한 혁명의 현지참모부’, ‘수령 결사옹위의 전위대’로 활동했다고 밝혔다. 북한 225국은 왕재산 조직에 다음과 같은 지시를 통해 사상무장을 강조했다.
 
  “중요한 문제는 모든 지도부 성원들이 그 어떤 정세변화 속에서도 장군님께서 하라는 대로만 하겠다는 혁명적 신념을 지니는 것이다.”
 
  총책 김씨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 등 북한 5대 명절 때마다 충성맹세문을 작성해 북한에 전달해 왔다. 지난해 3월 천안함 폭침 사건이 터지자 “전쟁이 일어나면 김정일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총폭탄’이 되겠다”며 충성을 강조했다.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엔 “반공화국 책동을 벌이려던 적들의 책동은 공화국의 무진 막강한 혁명무력 앞에 무산됐다”며 “김정일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당 중앙위를 목숨으로 사수하고, 후계자님을 받들어 혁명승리를 위한 총폭단이 되겠다”는 등 충성맹세를 이어나갔다.
 
  충성맹세문과 함께 ‘정성품’도 상납했다. 정성품은 “김일성 부자에게 정성과 성의를 다해 바치는 선물(뇌물)”을 뜻한다. 2005년 8월, ‘조선노동당 창건 60돌 기념’으로 매화 문양이 담긴 매화석을 보내며 “1만 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의미로 수석을 정했고, 추운 겨울에도 변치 않는 매화의 의미를 담았다”고 했다.
 
  북한은 2005년 이들의 성과와 충성심을 인정해 총책 김씨, 인천지역책 임씨, 서울지역책 이씨, 연락책 이씨에게 노력훈장을 수여했다. 연락책 이씨는 국기훈장 2급도 받았다.
 
  왕재산은 기존 간첩단이 북한에 활동자금을 의존한 것과 달리, 기업을 직접 설립해 활동자금을 마련했다. 총책 김씨가 연락책 이씨와 2002년 6월 세운 ‘지원넷’은 북한 225국으로부터 핵심기술을 지원받아 ‘주차장용 차량번호 인식시스템’ 등 상용프로그램을 개발ㆍ판매해 약 22억원의 연 매출(2009년)을 올렸다.
 
  인터넷과 이메일을 통한 고도의 첩보통신 수법도 기존 간첩단과 달라진 행태다. 북한 공작조직이 개발한 ‘스테가노그래피’(steganography) 기법을 이용해 비밀 메시지를 신문기사 등 파일에 은닉했다. 존재까지 숨겨진 암호 내용을 보려면 복호화 프로그램을 이용해 평문으로 바꿔야 한다.
 
  공안당국은 왕재산이 선거 개입 등 정치권에도 직접 침투했다고 밝혔다. 북한 225국은 각종 선거 때마다 왕재산에 지령을 하달해 “진보세력과 개혁 민주세력의 역량 확대”와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진보 대통합정당 구성” 등을 지시했다.
 
 
  민주당 공천받기 위한 노력도
 
  조직원이 직접 국회의원 출마도 시도했다. 2002년 3월 총책 김씨는 “여야 상층인사 2~3명을 담당하여 교양전취하고, 김정일을 따라 조국통일에 나서도록 하라”는 225국의 지령을 받자, 16대 대선 당시 모 후보 진영에서 활동했던 서울지역책 이씨(관상봉)가 적임자라고 판단해 이듬해 7월 이씨의 활동경력 등이 담겨 있는 대북보고문을 통해 ‘본부(북한)의 승인’을 요청했다.
 
  2004년 4월 북한 225국이 이를 승인, “연구소 설립을 비롯한 정치활동 거처를 빠른 시일 내 마련하라”는 구체적인 지령을 내렸다. 이씨는 과거 평민당 재야입당파 모임인 ‘평화민주통일연구회’ 소속 국회의원 및 회원 10여 명과 정치적 연대를 긴밀히 유지하면서, 당시 대권주자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씨는 2006년 6월부터 2008년 2월까지 임채정(林采正) 당시 국회의장의 정무비서관(3급)으로 근무했다. 임 전(前) 국회의장은 이에 대해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씨는 나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며 “국회의장 비서관이 국가 중요 정보에 선이 닿았으면 얼마나 닿았겠느냐. (공안당국과 언론이) 나와 연관지어 사건을 증폭시키려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씨는 다른 캠프로 옮겨 대선 활동을 했지만, 해당 후보가 경선에서 패배하자 자신이 직접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2008년 2월 제18대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민주당 남양주을(乙) 지역구에 공천을 신청했지만, 탈락했다. 북한 225국은 이씨의 공천 탈락 후 정치권 활동이 소강 국면에 접어들자 지난 1월 말 총책 김씨와 서울지역책 이씨를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불러 활동을 독려했다.
 
 
  北 학술지 DB 구축해 ‘합법’ 배포
 
  왕재산은 정부로부터 북한 매체 등 특수간행물 취급인가를 받아 북한 매체 내용을 배포하는 등 ‘합법적 북한 선전’을 시도했다. 총책 김씨는 2001년 자신의 대학 운동권 후배인 유모(선전책)씨를 포섭해 전자책 출판 전문 벤처기업 ‘코리아콘텐츠랩’ 설립 임무를 부여했다.
 
  코리아콘텐츠랩은 “김정은 대장동지의 권위를 옹호고수하기 위한 위대성 도서를 출판보급하고 CD로 복사해 인천지역당 조직성원들과 10여 개 진보적 언론단체들에 보급하라” “출판선전거점은 수사기관의 가장 우선적인 색출대상이므로 조직보위를 위해 조직(지하당)과 관계를 맺지 말고 핵심만 내세워 운영하라”는 등 북한의 지령에 따라 선전거점으로 활용됐다.
 
  코리아콘텐츠랩은 남한의 《민족21》 및 북한의 조선출판물수출입사와 함께 북한학술지 통합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북한의 각종 학술자료를 배포하기도 했다. 해당 홈페이지에 따르면, 코리아콘텐츠랩은 개발 및 판매, 《민족21》은 남북 간의 법적 절차에 따른 접촉과 실무, 조선출판물수출입사는 선정한 콘텐츠의 수집 및 진행에 필요한 내부 협의를 각각 주관한다. 코리아콘텐츠랩은 “모든 절차는 통일부 등 남북 관계기관의 지도와 승인을 받아 진행한다”고 밝혔다.
 
  왕재산은 친북좌파가 주도하는 각종 집회와 시위에도 적극 참가해 투쟁을 벌였다. 이들이 참여한 시위는 국가보안법 폐지 촛불집회 및 총궐기 대회, 광화문 총파업 결의대회, 인천 문학산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 저지,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평택미군기지 확장 저지, 부산 APEC 반대 투쟁, 한미 FTA 저지 투쟁, 을지포커스 반대 투쟁 등이다.
 
 
  北 “터무니없는 모략 사기극”
 
  검찰과 공안당국은 이번 수사에서 모두 1673건의 문건을 확보했고, 이 중 북한으로부터 받은 지령문은 28건, 대북 보고문은 82건, 통신문건은 230건이라고 밝혔다. “혐의를 입증할 증거물이 많아 보강수사를 통해 공소 유지엔 문제없다”고 자신했다.
 
  한편, 폭로 전문 웹사이트인 위키리크스(Wikileaks)는 최근 2006년 10월 운동권 출신의 간첩단 사건인 ‘일심회’ 사건을 수사하다 도중에 사퇴한 김승규(金昇圭) 국정원장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으로부터 사퇴 요구를 받았다는 미국 외교 전문을 공개했다.
 
  김 전 원장의 지인과 전직 국정원 관계자들은 외교 전문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고 했고, 김 전 원장도 “사의 표명이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니지 않겠느냐”며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만약 전문 내용이 사실이라면, 간첩단을 수사한다는 이유로 정권이 국정원장을 쫓아낸 셈이다.
 
  사태가 붉어진 2006년 당시에도 왕재산 조직원들은 활발한 간첩 활동을 하고 있었다. 총책 김씨와 인천지역책 임씨는 불법폭력시위를 주도하거나 주사파 학생운동 조직에서 활동한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 구성된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를 통해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돼 각각 420만원과 14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북한은 수사결과 발표가 나오기도 전에 ‘공식적인 선동’을 시작했다. 북한 대남(對南)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지난 8월 4일 왕재산 사건에 대해 “파쇼 공안당국이 떠드는 터무니없는 모략사기극”이라며 “충격적인 사건으로 대내외 정책의 총파산과 북남관계 파탄으로 인한 대중의 반정부 민심을 흐트러뜨리고 진보세력들의 활동을 용공, 친북으로 몰아 위기를 모면하고 보수세력의 재집권을 실현해 보려는 목적”이라고 비난했다.
 
  북한의 이 ‘공개 선전ㆍ선동’을 누가 따르게 될까. 제2 또는 제3의 ‘왕재산’들은 최근 재판과 여론 추이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만약 왕재산이 공작에 성공해 유력 기업을 세우고 국회의원 등 정치권에 입성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념의 시대는 갔다”고 외치며 종북(從北) 발언과 행동을 일삼는 일부 정치인을 보면 그저 가정으로만 끝날 말이 아니다. 지금은 대한민국 재판정에서도 “김정일 장군 만세”를 외치는 시대다.⊙

월간조선 2011년 10월호 - 원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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