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추적] 북한 독침테러 사건의 전모
박상학뿐 아니라, 김성민·이민복도 노렸다
⊙ 탈북자 단체 간부로 활동하며 10년여 위장… 정찰총국 지령 수령 후 “배신자에 대한 강력한 경고”
⊙ 공작금 1277만원 받아 대포폰과 베트남 도피 항공권 등 구입… 범행 전 시체유기 장소 답사까지 마쳐
⊙ 감시망 피하기 위해 수ㆍ발신 흔적 없이 ‘임시우편함’에 메시지 남기는 ‘사이버 드보크’ 기술 활용
⊙ 국정원 수사관, 맨주먹으로 차창유리 깨부수고 범인 체포한 사연
⊙ “김정일은 내게 ‘악마의 독침’을 날리려다 실패했지만, 나는 김정일을 향한 ‘진실의 독침’(대북전단)을
오늘도 날린다”(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탈북자 박상학씨 테러시도에 사용된 북한 독침.
지난 9월 3일 오후 4시10분. 탈북자 안모(54)씨가 서울 강남 한 일식집에 들어섰다. 평범한 옷차림에 작은 서류가방을 든 이 40대 남자를 종업원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예약된 자리에 앉은 그는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불안한 기색을 완전히 감출 순 없었다. 양복바지 오른쪽 주머니에 든 만년필형(型) 단발 독총, 왼쪽 주머니에 든 독약, 서류가방에 든 손전등형 독총이 계속 신경 쓰였다.
몽골에서 이미 수차례 독침과 독총의 사용법을 익힌 터, 안씨는 ‘목표물’만 도착하면 즉시 암살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이날 안씨와 만남을 약속한 인물은 탈북자 박상학(朴相學ㆍ43)씨로, 대북전단(삐라)을 주기적으로 북한에 날리는 등 반(反) 김정일(金正日) 통일운동을 활발히 펼쳐온 대북운동가다.
잠시 후, 안씨는 ‘뭔가 이상하다’란 느낌이 들었다. 암살 타깃인 박씨는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 식당 내부를 살피던 그는 이내 식당 출입구로 이동해 나갈 듯 말 듯 망설이다가, 계산대에 서 있던 종업원에게 자신의 차 열쇠를 달라고 했다. 열쇠를 건네받은 그는 들고 있던 서류가방을 차에 밀어넣었다.
순간 한 건장한 남자가 그를 덮쳤다. 안씨는 황급히 차에 올라타 문을 잠갔다. 시동이 걸린 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때 다른 남자가 차 앞을 몸으로 가로막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안씨는 우물쭈물했다. 이때 차 옆에 있던 남자가 운전석 창문을 맨주먹으로 깨부쉈다. 유리창은 산산조각났고, 안씨는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남자들은 범인의 자살을 막기 위해 독총과 독침 등 증거품부터 압수했다.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이 테러범 현장 체포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2주간 3차례 독침 공격
북한의 ‘독침테러’가 다시 시작됐다. 1996년 10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최덕근(崔德根) 영사가 북한 간첩으로 추정되는 괴한의 독침에 피살된 후 15년간 뜸했던 독침 공격이 지난 8월부터 2주 동안 총 세 차례 서울과 중국 동북 3성 일대에서 잇달아 발생했다. 지난 8월 21일 중국 단둥(丹東) 시내 한 백화점 앞에서 대북(對北)선교사 패트릭 김(46) 목사가 택시를 기다리던 중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병원으로 호송됐으나 숨졌다.
김 목사가 평소 탈북자를 돕고 김정일 비판 문건과 성경 등을 북한에 밀반입한 활동 정황과, 사망 전 북한이 직간접적으로 대북선교사들에게 “반드시 응징하겠다”고 위협한 사실을 볼 때, 북한 간첩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중앙일보》는 재중(在中) 대북 소식통을 인용해 “정찰총국이 사건의 배후이며, 고도로 훈련된 정보요원이 사전에 공격 대상자를 선별했다”고 보도했다.
김 목사 사망 다음 날인 22일 옌지(延吉)의 한 주차장에선 대북 선교 활동을 하던 한국인 강모(58) 목사가 차에 타려다 괴한의 주사기 공격을 받고 쓰러졌다. 강 목사는 병원으로 긴급 호송돼 목숨을 구했다. 북ㆍ중 접경의 동서 양끝에서 하루 시차를 두고 ‘독침 공격’이 자행된 셈이다.
1996년 옌지에서 발생한 기아자동차 기술훈련원 박병현(朴炳鉉ㆍ당시 54세) 원장 피살 사건도 북한 소행으로 추정되며, 1982년 망명해 김정일의 사생활을 폭로한 김정일 전처(성혜림)의 조카인 이한영(李韓永)씨도 1997년 북한의 남파 공작원에 의해 살해됐다.
과거 박정희(朴正熙)ㆍ전두환(全斗煥) 대통령 등 한국 최고위급 인사를 겨눴던 북한의 테러 목표가 최근 탈북자 단체 간부, 북한인권운동가, 대북선교사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들의 활동이 김정일 체제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한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사례다.
이번 독침테러 사건의 타깃이 된 박상학씨는 대남(對南)공작부서 ‘35호실’에서 고위급 공작원으로 활동하다 1999년 일본으로 탈출한 박건길(朴健吉·70)씨의 아들로, 2004년부터 김정일의 악행과 가계도를 폭로하는 대북전단을 휴전선 인근에서 대량 살포해 왔다. 북한은 끊임없이 정부에 이를 중단시키라고 협박했고, 남한 좌파단체들은 전단 살포 저지를 위해 현장에서 박씨와 몸싸움을 벌였다.
“공화국에 못되게 논다. 손봐줘야”
정보당국과 박상학씨에 따르면, 간첩 안씨는 지난 2월경부터 박씨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박씨는 “안씨가 탈북자 단체의 간부라 서로 알고 지냈는데, 2005~06년경 행적을 감췄다 다시 연락이 온 것”이라며 “탈북자로 위장한 간첩이 10년 정도 내부적응 기간을 거친 후 활동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는데, 안씨가 1995년 탈북한 사실을 볼 때 시기상 일리가 있다”고 했다.
탈북 후 국내 탈북자 단체의 사무국장을 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해온 안씨는 2005년경 활동이 뜸해진 후 사업에 나섰다. 그는 2010년 3월부터 몽골을 왕래하며 북한 평안북도 의주의 ‘황치령 샘물’ 개발 합작사업 등 남북경협을 추진한다는 이유로 북한 측 인사와 자주 접촉했다.
같은 해 7월, 안씨는 울란바토르 시내의 한 커피숍에서 북한 정찰총국 소속 간첩 C를 만났다. C는 안씨에게 “대북사업을 도와주겠다”며 “서로 믿기 위해 필요한 ‘자서전’을 제출하라”고 했고, 안씨는 ▲출생 ▲성장과정 ▲탈북경위 ▲남한정착생활 등의 내용이 담긴 5장 분량의 문서를 작성해 주고 귀국했다.
2달 후 C를 만나기 위해 몽골로 출국한 안씨는 C의 소개로 그의 상관인 간첩 K를 만났다. C와 함께 정찰총국 소속인 K는 북한대사관에 안씨를 수차례 불러 사업 논의를 진행해 왔다.
올해 3월 31일 몽골로 출국한 안씨는 울란바토르 시내 프랑스 레스토랑, 커피숍, 북한대사관 등에서 세 차례 K와 만났다. 이때 K는 1997년 황장엽(黃長燁ㆍ작년 10월 사망) 전(前) 노동당 비서와 함께 망명한 김덕홍(金德弘) 전 여광무역 대표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안씨에게 내렸다. 안씨가 북한 항공육전대 출신으로 20여 년간 군 복무했다는 사실을 파악한 K는 “김덕홍 암살에 성공하면 북한 내(內) 통제구역에서 생활하는 가족들을 평양으로 옮겨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고, 사업에도 도움을 주겠다”며 안씨를 회유했다. 이때 K는 박상학씨에 대해 “공화국(북한)에 못되게 놀고 있다. 손봐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 독총, 독침, 독약 제원
■ 파커 만년필형(단발형) 독총
⊙ 크기: 130㎜×10㎜ 무게: 57g
⊙ 작동방법: 뚜껑을 오른쪽으로 5번 돌리고 뚜껑을 밀면 발사
⊙ 독약성분: 브롬화네오스티그민(호흡정지, 심장마비로 사망)
■ 손전등형(3발형) 독총
⊙ 크기: 165㎜×37㎜ 무게: 263g
⊙ 작동방법: 안전장치를 빼고 발사버튼을 누르면 1발 발사, 다시 한 번 누르면 장전, 다시 누르면 발사
⊙ 독약성분: 브롬화네오스티그민
■ 파커 볼펜형 독침
⊙ 크기: 132㎜×10㎜ 무게: 35g
⊙ 작동방법: 뚜껑을 오른쪽으로 5번 돌리고 뚜껑을 밀면서 찌름
⊙ 독약성분: 브롬화네오스티그민
■ 독약 캡슐
⊙ 독약성분: 모노플로르초산나트륨(최장 5일 내 폐부종 또는 폐렴으로 사망) |
사용법 익히려 수차례 실습
당시 K는 북한대사관 직원에게 노트북을 가져오라 해 미리 저장해 놓은 동영상을 안씨에게 보여줬다. 내용은 북한에 있는 안씨의 아버지 산소를 촬영한 것이었다. K는 “(당신) 어머니는 잘 계신다. 죽기 전에 아들을 꼭 만나보고 싶어 한다”며 가족의 근황을 알려주고, 이를 빌미로 “반드시 (암살) 임무를 완수하라”고 압박했다.
4월 3일, 독침과 독총 등 암살도구가 제공됐다. K는 북한대사관에서 안씨를 만나 “우리가 여러 가지 장비를 가지고 왔다. 한번 보라”며 독총 2정(만년필형ㆍ손전등형 각 1정), 독침(볼펜형) 1개, 독약 캡슐 3개 등을 꺼내 보여줬다. K는 볼펜형 독침을 안씨 눈앞에 들이대고 “이 뚜껑을 잡고 오른쪽으로 다섯 바퀴 돌려 누르면 침이 나온다. 이를 찌르기만 하면 된다. 단발형 독총도 똑같이 뚜껑을 오른쪽으로 다섯 바퀴 돌리면 장전이 되고, 뚜껑을 밀거나 당기면 발사된다”며 사용법을 알려줬다.
또 손전등형 독총을 들고선 “검은색 마개를 떼어내고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1발 발사 후 버튼을 다시 누르면 장전이 되고, 다시 누르면 또 발사가 된다. 이런 식으로 세 발까지 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무기 시연도 그 자리에서 이뤄졌다. K는 손전등형 독총을 손에 든 채 “이걸로 실습을 해보자. 내가 시범을 보이겠다”며 손전등을 비추듯 손을 앞으로 뻗었다. 4~5m 앞엔 미리 준비해 놓은 합판이 놓여 있었다. K가 버튼을 누르는 순간 ‘핑’ 소리와 함께 약한 화약 냄새가 났다. 발사된 탄환은 합판을 관통했다.
K는 “이건 연습용이라 독도 없고 그냥 발사만 되니 실제로 한 번 쏴보라”며 총을 안씨에게 건넸다. 안씨는 사격 직후 ‘위력이 상당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독총 사격 연습을 마친 후, K는 암살에 필요한 폭탄 제조법도...
(계속)
기사 全文 보기 :
월간조선 2011년 11월호(바로가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