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납북고교생. (왼쪽부터) 이명우(천안농고 3년), 이민교(태광고 2년), 최승민(태광고 2년), 홍건표(천안상고 3년)
주간조선은 북한 당국이 작성한 만 17세 이상 평양시민 신상자료를 단독 입수, 지난주(2177호)에 보도했다. 이후 이 자료를 분석한 결과, 1977~1978년 전남 신안군 흑산면 홍도에서 납치된 고교생 이민교(52)·최승민(53)·이명우(51)·홍건표(51)씨가 평양에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주간조선은 국내 납북자 단체가 확보하고 있는 전후(戰後) 납북자 505명의 신상자료와 이번에 입수한 평양시민 신상자료를 일일이 대조한 결과,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그동안 북한은 이들 ‘고교생 납북자’ 4명의 생사 여부를 확인해 달라는 남측 가족의 요구에 대해 생사확인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해 왔다.
이들 고교생 납북자 4명 외에도 현재 평양에는 1960~1980년대 납북된 어부 10명과 1969년 납북된 KAL 승무원 3명 등 모두 21명의 납북자가 살고 있는 것으로 입수 자료 분석 결과 밝혀졌다. 이들 중 일부는 이산가족 상봉이나 북한 방송 출연, 북한으로부터의 통보 등으로 생사가 분명하게 확인된 사람들도 있지만, 상당수는 북한의 공식 문서를 통해 생사가 처음 분명하게 확인된 사람들이다. 북한은 그동안 공식적으로 “납북자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지만 이번 주간조선 입수 자료를 통해 그러한 주장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평양시민 신상자료는 작성 시점이 정확히 언제인지 확인되지 않아 이들 평양 거주 납북자 21명 중 현재 몇 명이 생존해 평양에 살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평양시민 신상자료를 주간조선에 제공한 대북 정보통은 “이 자료 작성 시점이 2005년으로 추정된다”고 밝혔지만 이 자료에는 2010년 시민증 재발급 기록도 기재돼 있다. 이를 보면, 2005년에 만들어진 자료가 최근까지 일부 업데이트가 이뤄졌던 게 아닌가 추정된다. 북한 당국이 사망자를 자료에서 삭제하는 작업을 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자료에 명시된 21명이 모두 생존해 있을 가능성도 있다.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는 이번 평양 거주 납북자 명단 21명이 확인된 것에 대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역사적 사건”이라며 “납북자 한 명을 생사 확인하는 것도 힘든데, 이렇게 무더기로 나온 것은 경천동지할 일”이라고 했다. 최 대표는 또 “북한이 끝까지 ‘생사 확인 불가’라고 주장했던 납북자들의 주소까지 상세하게 나온 상황”이라며 “북한이 그동안 범죄 사실을 은폐해 왔다는 증거가 드러났으니, 정부와 국제사회가 납북자 송환에 새롭게 나서야 한다”고 했다.
이번에 생존 사실이 확인된 4명의 ‘고교생 납북자’는 1977년 전남 신안군 흑산면 홍도에서 납치된 이민교(당시 18세)·최승민(당시 17세)씨와 1978년 같은 장소에서 납치된 홍건표(당시 17세)·이명우(당시 17세)씨다. 그동안 북한은 이들에 대해 남측 가족들의 생사 확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확인 불가”라고 답했었다. 지난 2006년 7월 통일부 당국자는 “고교생 납북자를 이산가족 범주에 포함시켜 관리해 왔는데 고교생 납북자 최승민, 이민교, 홍건표씨에 대해 북측이 생사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통보해 왔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통일부는 “또 다른 납북 고교생 이명우씨는 가족이 최근에야 상봉 신청을 해왔기 때문에 향후 상봉 행사에서 최우선으로 생사 확인 요청을 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후 이명우씨도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
▲ 북한 당국이 작성한 주민 신상자료 원본 파일
이들 외에 1978년 군산 선유도에서 실종됐던 고교생 김영남(당시 16세)씨는 2006년 6월 14차 상봉 행사장에서 어머니와 재회해 살아 있음이 밝혀졌다. 당시 김씨는 일본인 납북자 요코타 메구미의 남편으로 밝혀져 주목을 받았었다. 메구미는 대한항공 858기 폭파범 김현희의 일본어 교사였다. 김영남씨를 포함한 이들 5명의 고교생 납북자에 대해서는 2006년 4월 당시 김승규 국가정보원장이 국회 정보위에서 “북한에 생존해 있다”고 정보위원들에게 보고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북한은 김영남씨를 제외한 4명의 고교생 납북자의 생사 여부에 대해서는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이번 주간조선 입수 자료에 따르면, 이민교, 최승민, 홍건표씨 등 3명은 112연락소 지도원(연락소는 간첩 교육기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만경대구역 팔골2동으로 주소지도 같다. 또 이명우씨는 ‘인민경제대학 학생’의 신분으로 룡성구역 룡성 1동에 거주하고 있었다. 평양시민으로 분명한 직업까지 갖고 있는 이들에 대해 북한이 “생사 확인 불가”라고 답해온 것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평양시민 이름 분석 김정일 0명, 김일성 1명, 김정은 59명 자료에 나온 평양시민 중 김정일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국방위원장’을 빼곤 단 한 명도 없다. 김정일 이름을 쓰다 개명한 사람은 총 38명이다. 최연소 ‘김정일’이 1968년생인 점을 감안하면 김정일이 1970년대 김일성의 후계자로 지목된 뒤 ‘작명 금지령’이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이란 이름은 순안구역에 1명이 존재한다. 김일성의 경우 개명한 사람은 없고 본명인 ‘김성주’도 찾을 수 없었다. 김정남, 김정철, 김정은, 김한솔 등의 이름은 다수 확인됐다. 이들 대부분의 생년월일과 직업 등 신상정보는 ‘김씨왕조’와 관련이 없었다. 김정남은 1476명, 김정철은 1782명, 김정은은 59명이 있고, 김한솔은 1명(1968년생)이 평양에 살고 있다. |
▲ 1969년 KAL기 납북 사건 당시 북한에 착륙했던 동형의 대한항공 여객기.
자진 월북자 행적 ‘신생철학’ 윤노빈 전 부산대 교수 조국통일연구원 책임지도원으로 자진 월북자들의 행적도 확인됐다. 이른바 ‘신생철학’의 주인공 윤노빈 전 부산대 교수는 현재 ‘조국통일연구원 책임지도원’이란 직위를 갖고 평양에 살고 있다. 1982년 싱가포르에서 가족 5명을 대동하고 월북한 그는 ‘통영의 딸’ 신숙자씨의 남편인 오길남 박사와 함께 칠보산연락소에서 방송요원으로 활동했었다. 당시 사용한 가명인 ‘정영호’를 정식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대동강구역 동문2동에 살고 있다. 1967년 프랑스 유학 중 부인과 함께 월북한 정현룡씨는 101연락소 소속인 것으로 확인됐다. 정씨는 서울대 금속공학과 출신으로, 월북 후 칠보산연락소에서 ‘장석규’란 가명을 사용하며 대남 방송 ‘민중의 메아리’ 방송국 부소장을 역임한 바 있다. 경기여고, 이화여대, 영국 옥스퍼드대학 학력을 가진 정씨의 부인 윤향희(한성애)씨는 월북 후 ‘구국의 소리’ 영어 방송 요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26연락소에 소속돼 있다. |
▲ *이름 옆 괄호 안에 적힌 납북 연도와 납북 당시 신분을 제외한 사항은 주간조선 입수 평양시민 신상자료에 기록된 것을 그대로 옮긴 것임
1969년 KAL기 납북 사건 강릉발 김포행 KAL YS-11기 피랍… 승객·승무원 47명 중 11명 귀환 못해 KAL기 납북 사건은 1969년 12월 11일 일어났다. 강릉을 떠나 김포로 향하던 KAL YS-11기가 강원도 대관령 상공에서 북한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해 북으로 납치됐다. 납치된 비행기는 함경남도 원산 근처 선덕비행장에 강제 착륙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비행기엔 기장 및 승무원 4명과 간첩을 포함한 승객 47명이 타고 있었다. 납북 직후 북한은 전원 송환을 약속했으나 이듬해 2월 14일 판문점을 통해 돌아온 인원은 승객 39명뿐이었다. 나머지 북한 측 간첩을 제외한 11명의 피랍자들은 북한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1969년 사건 발생 당시 치안국은 “북괴의 고정간첩이며 강릉에서 자혜병원을 경영하던 승객 채헌덕(당시 38세)이 주범으로, 다른 승객 조창희와 부기장인 최석만을 포섭해 비행기를 납북해 갔다”고 발표했었다. 하지만 그해 12월 15일 조중훈 당시 KAL 사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최석만의 가정과 과거 생활태도로 보아 간첩 행위를 할 만한 결정적 단서가 없다. 경찰의 단순한 추정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1970년 2월 15일 중앙정보부와 치안국은 송환된 피랍자들에 대한 재조사 결과 고정간첩이었던 조창희가 남한에서의 간첩 활동 후 북한의 지령을 받고 비행기가 이륙한 지 약 14분 후에 조종사를 위협해 납북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발표에서 부조종사 최석만이 채헌덕에게 포섭됐다는 전년도의 치안국 발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에 주간조선이 평양 거주를 확인한 KAL YS-11기 피랍자 3명을 제외하고, 확인이 되지 않은 9명의 신원은 다음과 같다. 기장 유병하(남·당시 37세)씨와 승객 김봉주(남·당시 28세)씨, 임철수(남·당시 49세)씨, 장기영(남·당시 41세)씨, 채헌덕(남·당시 35세)씨, 황원(남·당시 32세)씨, 이동기(남·당시 48세)씨, 최정웅(남·당시 30세)씨다. 이 9명은 이번 평양시민 명단에선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명단에 없다고 해서 생사(生死)가 확인된 것은 아니다. 이들이 평양 외 지역에 거주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납치 피해자 황원씨의 아들이자, ‘1969년 KAL납치피해자 가족회’의 대표인 황인철씨는 10월 19일 주간조선과의 통화에서 “올 8월에 비공식적 통로를 통해 아버지가 평양 근교에 살아계신다는 말을 들었다”며 “이번 명단을 통해 파악되진 않았지만 아직 희망의 끈을 놓기엔 이르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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