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분석] 록키와 미키 마우스 등장한 평양 모란봉악단 공연
‘세계적 추세’ 내세운 김정은의 파격행보… 개혁으로 이어질까
⊙ 미국 복서가 소련 라이벌 다운시키는 장면 방영… 엄지 치켜올리며 박수 친 김정은
⊙ 대북전문가들 “김정은 옆자리 여성은 부인”, “여동생·극단 관계자 가능성도 배제 못 해”
⊙ 북한 內 경제개혁조치 임박說 확산… 개혁 정도와 정확한 시기는 미지수
하이라이트 장면이 주제곡 연주와 함께 상영됐다.' height=270>
지난 7월 6일, 평양 만수대 예술극장에서 모란봉악단 창단 시범공연이 열렸다. 김정일(金正日)은 생전에 ‘보천보 전자악단’, ‘왕재산 경음악단’과 같은 ‘기쁨조 예술단’ 공연을 즐긴 바 있다. 그의 아들이 아버지 사후(死後) 조직한 모란봉악단은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를 모시고 진행한 모란봉악단 시범공연”이란 타이틀을 내걸고 파격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다음 날 조선중앙TV가 김정은의 관람소식을 보도하자, 남한 언론과 외신의 첫 관심은 그와 나란히 앉은 세련된 여성의 정체였다. 여동생, 부인 등 여러 설을 두고 갖가지 분석이 쏟아졌다.
관람석 묘령의 여인과 함께 무대 위 여성들도 큰 주목을 받았다. 짧은 미니스커트에 ‘킬힐’까지 신고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노래하고 연주한 이들을 언론은 남한의 걸그룹과 비견했다. 무대 뒤편 대형화면에선 <백설공주>와 <미키 마우스> 등 서구 애니메이션이 나온 사실까지 알려지자, 일부 언론은 김정은이 최근 공개적으로 언급해 온 ‘세계적 추세’와 연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7월 11일 밤, 99분 분량 전체 공연 장면이 공개됐다. 더욱 문제가 된 장면은 따로 있었다. 악단의 여성 단원들이 미국 영화 <록키>의 주제곡 ‘Gonna Fly Now’를 연주했고, 대형화면은 록키 발보아가 강력한 펀치로 소련 라이벌 이반 드라고를 흠씬 두들겨 링 위에 다운시키는 모습을 방영했다. 이른바 ‘철천지 원쑤 미제(美帝)’의 복서가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 선수를 무너뜨리는 장면을 평양 한복판에서 ‘최고 지도자’가 보는 가운데 내보낸 것이다. 대다수 탈북자와 북한 전문가들이 입을 모았다. “김정일 시대였다면, 공연 책임자는 정치범으로 지목돼 총살당했을 사건이다.”
“개혁·개방까지 논하는 것은 확대해석”
99분에 달하는 공연 전체 영상은 현재 미국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YouTube)에 버젓이 올라와 있다. 환호하는 관객 앞에서 김정은이 입장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영상은 1, 2부로 나뉜 공연 전체와 김정은의 퇴장 장면까지 포함돼 있다. 김정은은 공연이 끝나자 환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며 엄지까지 치켜올렸다.
한 평양 출신 탈북자는 이번 영상 공개에 대해 “과거 김정일이 일부 기득권층과 공유했던 ‘기쁨조 공연’을 전(全) 북한과 세계에 보여준 셈”이라며 “김정은이 분명 ‘아버지와는 뭔가 다르다’는 메시지를 보여주려 한다”고 분석했다.
이날 공연엔 김정은과 함께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 김기남 당 선전비서, 현철해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 김양건·김영일·김평해 당 비서, 최부일·김명국 대장, 김영철 정찰총국장, 조경철 보위사령관 등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최고 권력층 대다수가 모인 셈이다.
북한 매체들은 김정은이 공연을 관람하면서 “인민의 구미에 맞는 민족 고유의 훌륭한 것을 창조하는 것과 함께 다른 나라의 좋은 것은 대담하게 받아들여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주체적 입장에서 우리의 음악예술을 세계적 수준에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공연 영상을 보면, 중국 음악의 경우 중국어 그대로 부른 반면, 미국 음악은 모두 북한말로 바뀌었다. 영화 <록키>의 주제곡 ‘Gonna Fly Now’는 ‘이제 곧 날아오르리’라고 소개됐고, 미국 월트디즈니 애니메이션 주제곡들은 ‘곰아저씨 뿌’, ‘비비디바비디부’, ‘미인과 야수’,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등 문구로 번역됐다. 모두 영문이나 출처 없이 ‘외국곡’이란 설명만 덧붙여졌다.
“‘김씨 왕조’ 스스로 부정할 수 있나?”
‘록키’, ‘디즈니’, ‘마이웨이(My way)’까지 등장한 공연을 두고 다수 언론은 스위스 유학과 일본 디즈니랜드 방문 경험이 있는 김정은이 아버지와 달리 국제사회에 대한 개방을 추진할 것으로 전망했다. 한 일간지는 칼럼을 통해 “김정은 체제가 실질적인 개혁·개방의 길로 가겠다는 신호탄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공연 하나를 두고 개혁·개방까지 연결짓는 것은 지나친 확대 해석이란 분석도 있다. 김광인(金光仁) 북한전략센터 소장은 “이번 공연이 충격과 파격을 던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문화에 국한된 변화를 가지고 김정은과 북한정권의 전면적 개혁·개방까지 논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선을 그었다.
김 소장은 “북한이 개혁·개방하면 잘살게 된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김정일이 가장 잘 알았다”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수준의 개혁·개방 정책을 북한이 하려면 주체사상과 ‘김씨 왕조’ 자체부터 스스로 부정해야 하는데, 과연 김정은이 이를 혼자서 추진할 수 있겠느냐”고 설명했다.
정성장(鄭成長)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이번 공연에 대해 “김정은의 친(親)서방적 문화 성향을 보여준 사례”라며 “김정일 사후 김정은과 핵심인사들의 발언은 북한의 개혁을 계속 예고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정 수석연구위원은 “중국의 틀에 갇혀 선진자본주의를 한 번도 보지 못한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은 어린 시절 스위스,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자본주의의 풍요함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했다”며 “개혁·개방을 체제붕괴로 본 김정일을 김정은이 공식적으로 부정은 못 하겠지만, ‘해외 경제개혁 사례 연구’ 발언이나 투자 관련 법령 개정 등 행보는 분명 차별화를 내세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해외 경제개혁 사례 연구 발언’은 양형섭(楊亨燮)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86)의 지난 1월 16일 AP통신과의 인터뷰를 말한다. 그는 인터뷰에서 “김정은 노동당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지식기반 경제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중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의 경제개혁 사례들을 살펴보고 있다”고 밝혀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된 바 있다. 북한 고위 당국자가 외신 인터뷰 등 공식석상에서 경제개혁을 언급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정 수석연구위원은 “김정일 사망 1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사실상 국상(國喪)’ 기간에 차기 지도자의 이름을 내걸고 ‘개혁’을 공개적으로 표현한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행위”라며 “이미 최고 지도부의 승인을 받은 정책 예고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북한은 지난해 11월에서 12월 사이 외국인 투자 관련 법령 14개를 제·개정한 바 있다. 특히 외국 투자 기업 및 외국인 세금법, 외국 투자 은행법 등 7개 법령은 김정일 사망 4일 후인 12월 21일에 개정돼 김정은의 개혁 가능성 주장에 힘을 실었다.
대북매체들 “北 경제개혁조치 임박”
김정은이 경제개혁 조치를 곧 취할 것이란 구체적인 예측도 제기되고 있다. 탈북자 단체인 ‘NK지식인연대’는 지난 7월 11일과 13일 홈페이지를 통해 “7월 5일 각급 당 조직은 당원들에게 내각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경제관리 체계를 8월 1일부터 도입하는 것에 대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방침을 전달했다”는 북한 내부 통신원의 말을 인용하며 “새로운 경제관리 체계 도입이 임박해 북한 사회에 일대 혼란이 일고 있다”고 밝혔다.
NK지식인연대는 “내각의 역할을 최대한 높이는 방향에서 경제관리를 개선하되 7월 말까지 구체적인 시행조치를 취하고 8월 1일부터 실시된다”며 “구체적인 내용은 전달되지 않았지만, 서비스·무역 분야에서 개인자본을 투자하는 영리활동 합법화가 포함될 것”으로 예측했다.
대북매체 《데일리NK》는 그보다 앞선 지난 7월 10일 “김정은 첫 경제개혁… ‘先국가투자 後분배’”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새로운 경제관리 체계가 올해 10월 1일에 시행된다”고 보도한 바 있다. 평안북도의 내부 소식통을 인용한 이 기사는 “‘우리 식의 새로운 경제관리 체계를 확립할 데 대하여’란 제목의 이른바 ‘6·28방침’이 내부에 공표됐다”며 “협동농장과 국영공장에 시장가격이 반영된 생산비용을 선(先)지급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고 전했다.
‘8·1조치’가 될지, ‘10·1조치’가 될지 현재로선 확정할 수 없지만, 김정은의 첫 경제개혁 조치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현재 북한 내부에 크게 도는 것은 사실이다. 두 매체의 보도와 탈북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농업, 산업, 유통, 무역 등 여러 분야에 대한 개혁이 시행될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정도와 시기는 여전히 미지수다.
김정은 옆자리 여성의 정체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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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이 공연 관람 후 밝은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는 모습. 옆자리 여성에 대해 북한 전문가들은 김정은의 부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
김정은 체제의 파격 행보와 함께 7월 6일 모란봉악단 공연을 김정은 옆에서 관람한 여성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김정은의 부인, 여동생 여정, 보천보 전자악단 출신 가수 현송월, 모란봉악단 관계자 등 온갖 추측이 난무했지만, 현재 대다수 전문가는 ‘퍼스트레이디급 여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김정일 장례 때 등장한 김여정과는 외모가 많이 다르며, 가수나 악단 관계자가 이른바 ‘최고 지도자’와 나란히 앉는 것은 북한 현실에선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공연에 이어 지난 7월 8일 금수산태양궁전 참배에까지 같은 모습의 여성이 동행한 것으로 알려지자 ‘김정은 부인’에 대한 가능성이 더욱 힘을 받고 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여성의 나이는 현재 27세, 키는 164cm 정도,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란 정보를 입수했다”며 “김정은의 공식 권력승계가 마무리된데다 어머니인 고영희에 대한 개인숭배 기록영화도 제작돼 자신의 부인을 공개해도 될 시점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2011년 10월 대북매체 《데일리NK》는 “김정은이 김일성종합대학 박사과정인 두 살 아래 여성과 결혼했으며, 이 여성의 본가는 청진시 수남구역으로 아버지는 청진시 대학 교원, 어머니는 수남구역 병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는 북한 내부소식통의 제보를 보도한 바 있다.
김광인 북한전략센터 소장은 “김정은 입장에선 재일교포 출신에 떳떳하지 못한 과거를 가진 생모 고영희를 신격화하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신선한 이미지의 젊은 부인을 내세우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며 “김정일과 달리 김일성(金日成)이 부인 김성애(金聖愛)를 공식석상에 자주 데리고 나온 것을 볼 때 김정은이 부인을 공개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분석했다.
“개방의 신호탄이 아니라 불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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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봉악단 공연에선 짧은 미니스커트와 ‘킬힐’ 등 파격적 의상의 단원들과 ‘미키 마우스’, ‘곰돌이 푸’ 등 미국의 디즈니 캐릭터들이 등장했다. |
모란봉악단 공연의 파격 연출이 남한 언론에 보도된 지난 7월 12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선 2007년 사망한 전임 외무상의 이름이 적힌 북한의 영문 발표문이 배포됐다. 김성환(金星煥) 외교통상부 장관과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 등 각국 주요 인사가 참여한 아세안 지역 안보포럼(ARF)에서 일어난 이 사건으로 북한은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다.
공연에 15분 넘게 등장했던 미키 마우스와 곰돌이 푸 만화 캐릭터들에 대해 미국의 월트 디즈니사(社)는 “저작권 사용 허가를 낸 적이 없다”고 한다. 미국 국무부는 “북한이 국제 저작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촉구하며 “미국이 북한과 외교 관계를 갖지 않고 있어 다른 국가들의 경우처럼 저작권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 탈북자는 이에 대해 “‘개방의 신호탄’이 아니라 ‘개방의 불발탄’이다”며 “대미(對美) 관계 개선을 목적으로 미국에 추파를 던지고 있지만, 미국이 받아들일지 의문”이라고 했다. 이번 공연에 대한 7월 13일자 《조선일보》 사설 중 일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정책 사령탑 임동원·이종석 두 전직 통일부 장관이 이끄는 한반도 평화포럼은 얼마 전 차기 정부가 실천해야 할 핵심 과제로 새 정부 첫해인 2013년에 제3차 남북 정상회담을 열 것을 주문했다. 대한민국 차기 대통령의 최우선 과제가 미 할리우드와 디즈니 그리고 서울의 걸그룹에 푹 빠진 미혼(未婚)인지 기혼(旣婚)인지도 알려지지 않은 북의 20대 지도자와 마주앉아 한반도의 장래를 논의하는 일이라면 다음 대통령의 처지가 딱하다.”⊙
월간조선 201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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