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밀분석] 또다시 등장한 장준하 타살說의 허구
장준하 두개골 골절과 골반 골절은 ‘타살’이 아니라 ‘추락사’의 결정적 증거!
⊙ 목격자 김용환氏, 1975년 수사·1988년 경기도경·1993년 민주당·2002년과 2004년 의문사委 조사…
5審도 모자라 6審까지 할 기세
⊙ 이미 확인된 ‘두개골 함몰 골절’만 집중 부각… 새로운 추락 증거인 ‘골반 골절’은 외면
⊙ 현재 의혹대로라면 단독산행 유도→마취→무의식 상태→가격→추락 모든 경우의 수 맞춰야
⊙ 주삿바늘 자국 발견한 유족 측 검안醫 “협심증 때문에 주사를 맞았을 것… 크게 신경 쓰지 않아”
⊙ 일상적 접견 기록 내세워 “청와대가 사건 통제한 증거”라 주장하는 野圈
⊙ 1993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수사와 무관한 군법무관 출신 변호사의 잡담을 근거로 타살 단정
최근 공개된 고(故) 장준하 선생의 유골 사진. 전문가들이 밝힌 유골의 특이사항은 지름 6~7cm 크기의 두개골 원형 골절과 오른쪽 골반 골절이다.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지난 8월 1일, 고(故) 장준하(張俊河·1918~1975) 선생의 유골에 대한 검사가 사망 37년 만에 이뤄졌다. 경기도 파주시 통일동산에 조성 중인 ‘장준하 공원’으로 이장(移葬)하면서 그의 죽음은 다시 한 번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검사 결과를 처음 보도한 《한겨레》는 8월 15일자 신문에 “장준하 선생 두개골서 6cm 뻥 뚫린 구멍”이란 제목과 함께 총 3면에 걸쳐 타살 의혹을 제기했다. 신문은 이후 20일까지 총 5일 동안 신문 1면을 통해 소위 ‘장준하 타살 의혹’을 집중 보도했다.
고인(故人)은 생전(生前)에 광복군 장교, 《사상계》 창간인, 제7대 국회의원 등을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재야운동가였다. 박정희(朴正熙) 유신(維新) 정권 시절인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수사결과 사인(死因)은 등반 중 추락에 의한 뇌진탕으로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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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장준하 선생. |
사건 18년 후인 1993년 3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명백한 타살사건”이라고 단정하면서 ‘의혹’에 대한 조사활동이 수차례 시행됐으나, ‘명백한 타살 증거’는 방송 이후 19년 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한겨레》 보도 직후 민주당은 진상조사와 박근혜(朴槿惠)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사과를 촉구하고 나섰다. 당 차원의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민주당 대선주자들은 박 후보에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손학규(孫鶴圭) 경선후보는 “타살이라면 박근혜 후보는 석고대죄하고 후보직을 사퇴하라”고 했고, 정세균(丁世均) 후보는 “친일파 박정희에 의한 독립군 장준하 타살이면 박근혜 대통령은 불가하다”고 비난했다.
언론과 야권은 유골을 내세워 37년 전 죽음을 ‘사실상 타살’로 단정하는 듯한 기사와 주장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장준하 선생 부활은 유신 부활 막으라는 불호령”, “박정희가 그리 두려운가?”, “장준하 의문사, 누군가의 사전계획 따라 실행”, “독재가 민주주의 살해” 등 발언이 그대로 기사 제목으로 보도됐다.
의혹의 정점을 찍은 것은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지난 9월 1일 방송이다. 1993년 이후 19년 만에 다시 ‘장준하 추락사’를 취재한 방송은 “의학자 29명의 자문과 추락 실험 등 ‘입체적 분석’을 통해 사망 경위를 추적했다”며 “이제라도 진실을 가로막고 있는 단단한 벽을 거두고 지난 37년 동안 유족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결론지었다.
《월간조선》은 19년 전 장준하 타살 의혹에 대해 심층보도를 한 바 있다. 잊혔던 사건과 의혹이 최근 유골과 함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대선정국과 맞물려 정쟁(政爭)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두개골에 묻힌 ‘골반 골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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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이 1966년 10월 민중당 대구 유세 중 “박정희 대통령은 밀수왕초”란 발언으로 구속되기 전 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이번 의혹 제기의 핵심은 유골이다. 전문가들이 밝힌 유골의 특이사항은 지름 6~7cm 크기의 두개골 원형 골절과 오른쪽 골반 골절이다. 유골 사진을 처음 공개한 《한겨레》는 “망치 가격이 확실하다”는 유족 측의 입장을 1면 제목으로 선택했다.
서울대 의대 법의학연구소의 이윤성(李允聖) 교수가 이장 당시 작성한 검시 소견서에는 “머리뼈와 오른쪽 관골의 골절은 둔체에 의한 손상이지만 이 손상이 가격에 의한 것인지 넘어지거나 추락하면서 부딪쳐 생긴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다.
모든 언론은 두개골에 남은 원형 함몰 흔적에 집중했다. 네 조각이 난 골반 골절은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사실 ‘두개골 함몰’은 37년 전 수사 당시 이미 확인된 내용이다. 수사 당국은 ‘우측 후두부 함몰 골절’을 결정적 사인으로 적시했다. 유족 측의 요구로 사체를 검안했던 의학박사 조철구(趙澈九)씨는 소견서에 “직접 사망의 원인은 우측두 기저부 함몰 골절상으로 인한 두개강 내 손상”으로 기록한 바 있다.
두개골 함몰 골절은 1993년 3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 때는 물론, 같은 해 9월에 공개된 민주당의 ‘장준하 선생 사인규명 조사위원회’의 활동보고서, 2002년과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 이른바 ‘의문사’ 조사 때마다 직접적인 사인으로 지목됐다. 이에 대해 과거 정부나 수사 당국에서 반론을 제기한 적은 없다. 당시 검안 소견에서 분명히 드러난 직경 약 6cm의 함몰 골절 외상(外傷)이 이번 유골 검사를 통해 ‘확인’된 셈이다.
오히려 새롭게 발굴된 사실은 골반 골절이다. 사건 이후 의혹을 제기해 왔던 이들은 한 목소리로 “두부(頭部) 외에 골절이 없다”며 타살 의혹을 제기해 왔다. 사망 당시 조철구씨의 검안 소견은 골반부는 물론 경부(목), 흉부(가슴), 복부(배), 요부(허리) 등 모든 부분에서 골절상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서술한 바 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머리 외엔 골절이 없다”는 사안을 의혹에 대한 근거로 제시했다. 다음은 보고서 중 일부다.
“14m 정도 높이의 암벽에서 추락 시 발생해야 할 골절이나 열창 손상이 전혀 없었으며, 안면부 등 신체 노출 부위가 바위에 부딪히거나 긁힌 흔적 또한 전무했다는 참고인들의 진술을 봤을 때 사체 상태만 놓고 보더라도 장준하가 추락하여 사망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골반 골절은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
당시 위원회의 결정문도 비슷한 판단을 내놓았다.
“장준하는 위 높이에서 추락하였음에도 후두부에 함몰 골절상을 입은 외에 외상을 거의 입은 바 없는 등 사체 상태가 깨끗하였고, 착용한 의복에도 미끄러진 흔적이나 긁힌 흔적이 없어 위 지점에서 추락사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양승규(梁承圭) 전(前)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은 2005년 쓴 “장준하 선생, 그 죽음의 진실은?”이란 제목의 글에서 ‘위원회 활동보고서’를 인용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사체는 귀 뒤쪽 두개골 함몰 골절상 외 다른 골절상이 확인되지 않았으며, 시신의 모습이 깨끗하였다는 목격자들의 진술로 보아 75m(실제 추락지점은 14m) 높이에서 추락하였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한겨레》는 지난 8월 15일 첫 유골 검사 기사에서 ‘뻥 뚫린 두개골 구멍’에 대해선 집중적으로 보도했지만, 골반 골절은 언급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이윤성 교수가 밝혀내지 못해서인지, 유족 측이 밝히지 않아서인지, 담당기자가 취재과정에서 제외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유골 사진이 공개되기까지 이틀간 국내 모든 언론은 ‘두개골 6cm 구멍’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한겨레》는 8월 16일 오후 인터넷판을 통해 유골 사진과 검시 소견서를 공개했다. 소견서는 “가격에 의한 것인지, 넘어지거나 추락하면서 부딪쳐 생긴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고 명시했고, 이를 작성한 이윤성 교수는 “37년 된 유골을 눈으로만 보고서 머리뼈 손상 원인을 단정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기사 제목엔 유족 측의 주장인 “망치 가격 확실”이란 내용만 실렸다. 이튿날 지면에 실린 같은 기사의 수정된 제목도 이 교수의 소견 중 “뒷머리 함몰에 의한 사망” 부분만 뽑혔다.
이윤성 교수는 이후 인터뷰에서 골반 골절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밝힌 바 있다. 8월 18일자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 교수는 “오른쪽 볼기뼈(골반) 골절을 발견하고 추락이 개입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골반 골절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다.
“(추락) 가능성을 높게 본다. 인위적 가격 뒤 절벽으로 장 선생을 추락시켰거나, 강제로 떠밀어서 바닥 근처의 돌에 부딪혔을 가능성 모두 있다. (추락이라도) 환경 등에 따라 (골절 부위가) 적을 수도 있다. (사망 당시) 부검을 했다면 폐나 간 같은 장기가 터진 모습이 관찰됐을 수 있다. 지금도 가격에 의한 타살이 보이지 않는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제대로 사인을 밝히려면 독극물 조사도 해봐야 한다.”
“역사적·사회적 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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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5월 대통령선거법위반 혐의로 수감됐다 24일 만에 출감한 장준하 선생. |
이 교수는 사인의 과학적 추론 방법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1975년 장 선생 사망 당시 부검을 해야 했었다.”
유골은 가장 과학적·객관적인 증거다. 가격인지 추락인지 확정할 수 없는 두개골 함몰과는 달리 골반 골절은 추락을 확실히 입증했다. 하지만 여론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유골이 마치 ‘결정적 타살 증거’인 듯 ‘타살설’을 키웠다. 그리고 줄줄이 엮인 의혹 제기 기사엔 박근혜 후보를 비난한 내용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한 달에 걸쳐 ‘타살 의혹’ 여론을 주도했던 《한겨레》의 한 칼럼 내용 중 일부다.
“37년 동안 장준하 선생이 왜 죽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어요. 의학적 소견은 여전히 ‘의혹’이지만 역사적·사회적 소견은 ‘타살’이에요. 억울하고 비통한 모든 죽음에 분노할 줄 아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최우리 《한겨레》 기자, ‘키워드 놀이’ 中)
보름 동안 이어져 온 타살 의혹의 정점을 찍은 것은 지난 9월 1일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장준하, 그 죽음의 미스터리’ 편이다. 제작진은 과거 제기됐던 여러 의혹을 정리해 사실상 타살 가능성에 비중을 둔 듯한 결론을 방송으로 내보냈다.
방송을 별생각 없이 보면 여러 과학적·객관적 증거가 타살을 완벽히 입증한 듯하지만, 구체적인 논리 전개 과정을 보면 의문점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다큐멘터리 방송의 특성상 반전(反轉) 효과는 곳곳에 주어질 수 있지만, 이야기의 흐름 전체가 갈팡질팡하면 방송을 보는 이에겐 혼란만 가중된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알고 싶다〉 내용은 처음엔 두개골을 내세워 둔기에 의한 살인인 것처럼 보이다가, 골반 골절이 추락의 증거라는 전문가들의 소견에 의해 ‘가격 후 추락’으로 무게가 옮겨진다. “대상(피해자)이 움직인다면 테두리가 분명한 원형 함몰이 나올 수 없다”는 전문가의 의견이 나오자 ‘무의식 상태의 가격’이 새롭게 제기된다.
“外傷은 존재했다”
SBS는 무의식을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팔과 엉덩이의 주삿바늘 자국을 들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의학적인 분석을 접고 목격자에 대한 의혹으로 넘어갔다. 다음은 〈그것이 알고 싶다〉 사회자의 발언이다.
“가격이냐, 추락이냐. 팽팽히 맞서던 전문가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대목에서 교집합을 이뤘습니다. 이 유골의 골절이 가격에 의한 것이든 추락에 의한 것이든 장준하씨는 그 이전에 이미 의식을 잃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그리고…
<월간조선> 2012년 10월호 - 기사 全文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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