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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도래 250년, 고구마의 재발견: 식량·환경·에너지 문제의 새로운 대안

사회

by 김정우 기자 2013. 11. 18.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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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3년 10월 초, 일본 대마도(對馬島)를 답사하던 통신정사(通信正使) 조엄(趙曮)의 눈에 희귀한 ‘풀뿌리’가 들어왔다.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작물의 특이한 모양새를 두고 조엄은 산약(山藥), 무뿌리(菁根), 오이, 토란 등에 비유했다. 그가 쓴 《해사일기(海槎日記)》엔 “잎은 산약 잎사귀 비슷하면서 그보다는 조금 크고 두꺼우며 조금 붉은색을 띠었다”며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생으로 먹을 수도 있고 구워서도 먹으며 삶아서 먹을 수도 있다. 곡식과 섞어 죽을 쒀도 되고 썰어서 정과(正果)로 써도 된다. 떡을 만들거나 밥에 섞거나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흉년을 지낼 밑천으로 좋을 듯했다.”

조엄은 이 작물 두어 말을 구해 부산진으로 보냈다. 다음 해 6월 돌아오는 길에 추가로 동래(東萊·現 부산 동래구)에 보내 심게 했다. 그는 “이것들을 우리나라에 널리 퍼뜨리기를 문익점(文益漸)이 목화를 퍼뜨린 듯 한다면 백성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작물의 일본 명칭은 ‘사쓰마이모(薩摩芋)’다. 대마도 사람들은 이를 ‘고코이모(孝行芋)’라 불렀다. 전설도 있었다. 가난한 효자가 산에서 고코이모를 발견하고 집에 심으니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노부모를 봉양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조엄은 감저(甘藷)와 효자마(孝子麻)란 이름과 함께 ‘고귀마(古貴麻)’란 대마도 발음을 함께 적었다. 현재 한국인은 이 작물을 ‘고구마’라 부른다.

전남 무안군 해제면 황토밭에서 농민들이 고구마를 캐고 있다. ⓒ서경리


⊙ 1763년 10월 조선통신사 조엄이 대마도에서 처음 도입… 대표적 구황작물
⊙ 쌀이 없어 먹었던 고구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神의 선물’
⊙ 최근 항암·다이어트 효과 입증… 美 공익과학센터 선정 ‘최고 건강식품’
⊙ 단위면적당 부양인구 높고 토양·수분 유실은 최소… “北 식량난 대안 가능성”


구황작물에서 웰빙식품으로

올해 10월로 국내 도입 250주년을 맞은 고구마가 최근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고구마는 우리나라 최초의 구황작물(救荒作物)이다. 기근(飢饉)이 심할 때 주곡(主穀) 대신 먹기 위해 심은, 별볼일없던 작물이 과학의 발전 덕에 ‘최고 웰빙(well-being) 식품’으로 변모하고 있다.

미국 식품영양운동단체인 ‘공익과학센터(CSPI)’는 ‘최고 건강식품(best foods)’ 중 고구마를 1위로 선정하며 ‘영양 올스타(nutritional all-star)’, ‘최고의 채소(best vegetables)’로 명명(命名)했다. 공익과학센터는 2007년 선정한 이 순위를 현재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2008년 미국 농무성(USDA)은 감자, 고구마, 카사바, 옥수수 등 전분작물 중 척박한 땅에서 탄수화물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작물로 고구마를 골랐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고구마를 우주시대 식량자원으로 선택했다.

척박한 땅에서도 쉽게 잘 자라는 특성은 고구마를 최근 지구적 문제로 떠오른 글로벌 식량위기의 대안으로 꼽히게 했다. 세계식량농업기구(FAO)는 2050년 세계 인구가 약 91억명에 이르며, 이 경우 식량수요가 지금보다 70% 증가해야 한다고 예측했다.

고구마의 기원은 중남미다. 학자들은 멕시코 남동부의 유카탄(Yucatan) 반도와 베네수엘라 오리노코(Orinoco)강 하구로 추정한다. 페루 칠카(Chilca) 협곡의 동굴에서 약 8000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마 형태의 마른 뿌리가 발견된 바 있다. 코즈마(Cosma) 계곡에선 기원전 2000년경의 고구마 유물이 나왔다. 고대 마야·아스테카·잉카 제국 사람들은 고구마 재배는 물론 품종개량까지 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고구마가 널리 퍼진 것은 15세기 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부터다. 그가 옥수수, 담배 등과 함께 도입한 고구마는 스페인으로 전파됐다. 1565년 스페인 선원들은 이를 희망봉과 인도양을 거쳐 필리핀으로 전했다. 멕시코와 멀지 않은 북미 지역엔 17세기 초에야 페루 사람들에 의해 전파됐다고 한다.

필리핀에 안착한 고구마는 1594년 명나라 상인 진진용(陳振龍)을 통해 중국 남부 지방으로 건너갔다. 1601년 류큐(琉球)왕국의 사신 노쿠니 쇼칸(野國總管)은 이를 자국(自國) 영토인 오키나와(沖縄) 지역에 도입했다. 재배지와 수확량이 늘었고, 당시 식량 사정이 좋지 못했던 일본 본토까지 확산됐다. 결국 대마도까지 전파된 고구마가 조선 통신정사 조엄의 눈에 띈 것이다.

1763년 조엄이 들여온 씨고구마는 부산진 첨사(僉使) 이응혁(李應爀)에게 보내졌다. 이듬해 봄 파종(播種)을 시작했고, 이후 동래와 제주도에서 재배했다. 고구마를 처음 재배한 장소는 ‘조내기’로 불렸는데, 현재의 부산 영도구 동삼1동 언덕 일대를 말한다. ‘조내기’의 어원은 ‘조엄이 가져온 고구마를 캐낸 곳’이란 설이 유력하다.

작물에 대한 연구도 동시에 시작됐다. 고구마 재배에 성공한 동래부사(府使) 강필리(姜必履)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구마 전문 서적인 《강씨감저보(姜氏甘藷譜)》를 펴냈다. 농학자 김장순(金長淳)은 고구마를 9년간 연구해 1775년경 《감저신보(甘藷新譜)》를 저술했다. 1834년 실학자 서유구(徐有榘)는 앞선 서적을 참고해 고구마 재배와 식용 방법을 소개한 전문서적 《종저보(種藷譜)》를 편술했다.

조선통신사 갑신년(甲申年) 사행(使行)의 행렬 목판화. 고구마를 최초로 도입한 사절단 정사 조엄(趙曮)의 이름이 보인다.(조선DB·고판화박물관 제공)


고구마의 전파 경로

고구마의 세계 전파 경로는 크게 세 가지다. 콜럼버스를 시작으로 유럽, 아프리카, 인도, 중국에 이른 경로는 ‘바타타(Batata) 루트’에 속한다. 고구마 원산지인 서인도제도에서 고구마를 ‘바타타스’라 불렀다. 현재 고구마의 학명(Ipomoea batatas)도 이에 기인한다.

‘카모테(Kamote) 루트’는 16세기 이후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멕시코에서 하와이, 괌, 필리핀 등에 전해진 경로다. 멕시코에선 고구마를 ‘카모테’라 부른다.

콜럼버스 이전부터 남미 페루에서 태평양의 이스터섬, 뉴질랜드, 하와이를 거쳐 폴리네시아와 뉴기니섬 등으로 전파된 경로를 ‘쿠마라(Kumara) 루트’라 부른다. 이는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근대 이전 남미와 접촉했을 가능성과, 이들의 신대륙 이주설을 지지하는 증거로 부각됐다.

세 경로를 종합해 보면, 1000~1100년경 남미에서 고구마를 가져온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태평양 일대에 퍼뜨렸고, 16세기 이후 스페인 사람들은 유럽에 고구마를 공급했음을 알 수 있다.

中 사막화 대안 작물

고구마의 최대 강점은 ‘생산성’이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란다. 다른 작물이 자랄 수 없는 토양에서도 재배가 가능하다. 재해에 강하며,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많다. 전 세계 재배 적지(適地)가 넓은데다 싼값으로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다. 줄기가 땅 표면을 덮기 때문에 비바람에 의한 토양 유실이 적고, 수분 증발을 막아 가뭄 피해를 줄인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환경바이오연구센터의 곽상수(郭尙洙) 센터장은 “고구마는 인류가 당면한 환경·식량·에너지·보건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팔방미인 산업용 작물’”이라고 했다. 고구마 생명공학 연구만 20년째 해온 그는 ‘고구마 박사’로 불린다.

곽 센터장은 첨단 유전체 정보와 생명공학기술을 이용한 분자육종으로 전통 육종기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기능성을 대폭 높이고, 재배지역을 확대한 신품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곽 센터장을 포함한 국내 연구팀은 현재 ▲사막 지역, 추운 지역, 공해 지역 등 열악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고구마 ▲전분생합성을 조절해 에탄올 생산에 적합한 고구마 ▲가축 백신 등 유용성분을 생산하는 고구마 등을 개발하고 있다. 곽 센터장은 “궁극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에탄올과 의약품을 한꺼번에 경제적으로 생산하는 신세대 고구마 개발이 기대된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이미 작물이 잘 자라는 곳에 고구마를 심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사막화가 진행돼 사실상 버려진 땅에 고구마를 심어 식량, 환경, 에너지 문제를 해결한다는 뜻입니다. 재배에 성공하면 사막화 방지는 물론 지역민의 소득증대란 효과까지 얻게 됩니다.”

'고구마 박사' 곽상수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환경바이오연구센터장

‘고구마 박사’ 곽상수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환경바이오연구센터장은 “첨단 유전체 정보와 생명공학기술을 이용한 분자육종으로 고구마는 인류가 당면한 환경·식량·에너지·보건 문제의 새로운 대안이 될 것”이라고 했다. ⓒ서경리


곽 센터장 연구팀은 현재 중국농업과학원의 고구마연구소 등과 협력해 중국 내몽골 지역의 쿠부치 사막 일대에 고구마를 시범재배, 2011년 가능성을 확인한 바 있다. 중국, 카자흐스탄, 알제리, 중동 등 중앙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작물 재배 조건 불리 지역을 중심으로 대안작물로서의 고구마 재배를 추진하고 있다.

고구마는 단위면적당 부양인구 능력이 다른 작물보다 월등히 높다. 일본 농무성 연구에 따르면, 10a(1000m2)당 285만kcal의 에너지를 생산한다. 1년 동안 3.9명의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열량이다. 감자는 246만kcal로 3.4명을, 벼는 178만kcal로 2.4명을, 옥수수는 74만kcal로 1명을 부양하는 수준이다.

곽 센터장은 고구마의 장점이 북한 식량문제의 해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2007년 식량농업기구 통계에 따르면 북한의 고구마 재배면적은 2만8000ha(2억8000만m2)로 남한의 2배다. 하지만 단위면적당 고구마 생산성은 1ha당 13kg으로 남한의 68% 수준이다. 전체 생산량은 약 36만t이다.

1946년 찐 고구마를 팔러 나온 어린 자매(왼쪽)와 1964년 판자촌 단칸방에서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는 모습. 반세기 후 고구마는 ‘최고 웰빙식품’으로 떠올랐다.(조선DB)


“北, 감자 대신 고구마 심어야”

북한의 고구마 생산성이 낮은 이유는 남한보다 기온이 낮기 때문이다. 열대작물인 고구마는 추위에 약하다. 북한 지도부의 오판도 한몫했다. 1998년 10월 북한 내 최대 감자 생산지인 양강도 대홍단군 감자연구소를 방문한 김정일(金正日)이 ‘감자농사 중시 정책’을 지시하면서 감자 증산이 추진됐다. 당시 감자로 만든 여러 음식을 ‘친히 맛본’ 김정일은 “인민의 먹는 문제를 해결할 확고한 전망이 열렸다”고 했다.

김정일의 ‘감자 주곡화’ 정책은 결국 실패했다. 15년이 흐른 현재까지 북한의 식량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척박해진 땅에서 수확이 적었고, 나온 생산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썩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고구마는 작물 경작지의 토양·수분 유실도 최소화한다. 1ha당 연간 토양 유실은 6.6t 정도로, 땅콩(26.7t), 벼(25.1t), 감자(18.4t), 옥수수(12t) 등보다 적다. 수분유실은 4.2% 정도인데, 벼(11.2%), 땅콩(9.2%), 감자(6.6%), 옥수수(5.2%) 등과 비교했을 때 현저히 낮다.

곽 센터장은 “북한 지역에 적합한 고구마를 개발하면 주민의 영양결핍뿐 아니라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까지 해결할 수 있다”며 “현재 추위에 강한 유전자 변형 내한성(耐寒性) 고구마 개발을 시도 중”이라고 했다. 그는 북한만 걱정할 상황이 아니라며 이렇게 설명했다.

“남한의 곡물자급률이 현재 27% 수준입니다. 식량은 경제논리가 아닌 안보 관점에서 다뤄야 할 문제죠. 한국은 OECD 국가 중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운 나라입니다. 고구마뿐 아니라 차세대 작물에 대한 집중연구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고구마 시장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117개국에서 약 1억400만t의 고구마를 생산하고 있다. 이 중 중국이 7557만t을 생산해 세계 생산량 중 72%를 차지한다(2011년 기준). 대부분 중국 국내에서 소비하며, 0.03% 정도만 수출한다.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등 국가를 합하면, 아시아의 생산량은 80%에 이른다. 16%를 차지한 아프리카가 뒤를 이으며, 유럽과 캐나다 등 선진국에선 대부분 수입한다. 세계 소비량의 54%가 식용이며, 39%는 사료용, 0.04%는 가공용으로 쓴다. 먹을 것이 부족한 아프리카에선 85%를 식용으로 이용한다.

아프리카의 기근과 영양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은 최근 ‘유전체 기반 고구마의 육종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아프리카는 세계 고구마 재배면적의 42% 가까이를 차지하지만, 생산수율(生産收率·원재료 투입에 대한 제품 생산비율)은 아시아의 4분의 1밖에 안 될 정도로 낮다.

군고구마 장수

1998년 겨울 군고구마 장수의 모습. 최근 고구마 원가가 상승해 더 이상 이런 모습을 보기 어렵다.(조선DB)


항암·다이어트에 좋은 準완전식품

한국은 현재 25만5000t을 생산해 전 세계 생산량 중 0.24%를 차지한다. 재배면적은 2011년 1만8000ha에서 2012년 2만3000ha로 증가했다. 수요 증가, 가격 상승, 수입 금지 등 이점 때문에 국내 많은 농가가 고구마 재배 비중을 늘리고 있다.

생(生)고구마는 수입하지 않는다. ‘개미바구미’와 ‘고구마바구미’ 등 열대 지역 해충이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전분과 당면 등 가공제품은 수입이 가능하며, 대부분 중국산(産)이다. 웰빙 식품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수요는 부쩍 늘었지만, 생산량이 이를 못 따라가는데다 수입도 할 수 없어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원가 상승은 최근 2~3년 사이 군고구마 장수들이 대부분 사라진 이유가 됐다.

고구마는 탄수화물이 풍부하고 단백질, 식이섬유, 미네랄 등이 골고루 함유돼 있다. 특히 칼륨과 비타민 함량이 높으며 비타민C는 조리할 때 열을 가해도 잔존율이 70~80%에 이른다. 필수 아미노산이 풍부하고 어린이 성장에 도움을 주는 라이신 함량이 옥수수나 쌀보다 높다.

‘준(準) 완전식품’으로 알려진 고구마가 최근 제2의 전성기를 맞은 이유는 성인병 예방과 다이어트 효과가 입증됐기 때문이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주황색고구마의 베타카로틴(betacarotene)과 자색고구마의 안토시아닌(anthocyanin)은 대표적 항산화 물질로 활성 산소를 제거해 노화와 질병을 예방한다.

특히 베타카로틴은 암세포 파괴와 발암물질 제거에 효과적이다. 일본 도쿄대 의과학연구소에 따르면, 고구마의 발암 억제율은 98.7%로 당근, 단호박 등 항암 효과 채소 82종 중 1위다.

당 지수(GI)가 낮아 당뇨병 예방에도 효과적이다. 당 지수가 낮은 식품은 다이어트에도 좋다.

식이섬유와 얄라핀(jalapin) 성분은 변비를 해소하고 대장암 예방에 효과적이다. 얄라핀은 고구마를 자르면 조금씩 나오는 하얀 우유와 비슷한 액체로, 고구마에 난 상처를 보호하는 성분이다. 식이섬유는 장 운동을 활발하게 하고 포만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장점은 몸매에 민감한 걸그룹 스타들이 앞다퉈 ‘고구마 다이어트’를 하게 만들었다.

농촌진흥청 산하 국립식량과학원 바이오에너지작물센터는 국내 대표적 고구마 연구기관이다. 연구진은 고구마의 용도별 신품종 육성, 고품질 안정생산기술 개발, 바이러스 무병 씨고구마 시범보급 등 연구를 진행 중이다.

1944년 국내 육성 1호인 ‘수원 147호’를 시작으로, 밤고구마로 불리는 ‘율미’, 베타카로틴 함량을 높인 ‘신황미’, 안토시아닌이 많은 자색고구마 ‘신자미’, 바이오에너지용 ‘대유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품종이 농촌진흥청에서 개발됐다. 이들이 최근 개발한 ‘다호미’는 일본의 ‘호박고구마’를 대체할 유력 신품종으로 꼽힌다.

농촌진흥청 정미남 박사(오른쪽). 기자에게 고구마 신품종 육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남 무안의 바이오에너지작물센터는 총 5ha 면적 3만 종의 개체를 9년에 걸쳐 연구하며, 이 중 한 개체만이 신품종으로 최종 선정된다. ⓒ서경리


저장기술 발달로 연중 출하

고구마의 종류는 약 2000여 종이다. 국내에서 식용으로 쓰는 고구마는 밤고구마·물고구마·호박고구마·주황색고구마·자색고구마 등 총 다섯 가지다. 오랜 세월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작물이라 국내 연구 규모와 성과가 중국이나 일본보다 뒤처져 있다. 다양한 품종 개발이 시급한 실정이다.

전국 고구마 농업생산액은 2005년 1525억원에서 2011년 3468억원으로 6년 만에 2배 이상 증가했다. 전체 식량작물 중 벼와 콩 다음으로 높은 수치다. 특히 강소농(强小農)과 전문 생산자 단체가 많아 기술력과 생산역량 기반이 잘 갖춰진 상태다. 현재 33만m2(약 10만평) 이상 면적에서 재배하는 사람만 2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농촌진흥청 정미남(鄭美男) 박사는 “감자에 비해 재배면적이 작고 생산량이 낮지만, 가격이 높아 총 생산액은 더 높게 나온다”며 “최근 대농(大農)의 비율이 빠르게 증가하고 재배면적 비중도 느는 등 급격한 규모화가 진행 중”이라고 했다. 그의 설명이다.

“한국 농업인 절반이 조금씩이나마 고구마를 키웁니다. 도시인들의 주말농장 작물 중 가장 인기 있는 것도 고구마죠. 관리가 쉽고 캐는 재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330~660m2(100~200평) 정도로 할 경우 통계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현재 국내 총 재배면적이 2만3000ha로 나오는데, 실제론 훨씬 더 많겠죠.”

국내 고구마 주요 생산지는 해남, 무안, 김제, 고창 등 호남 지역과 충남 논산, 그리고 경기도 여주다. 최근 고구마 붐이 불면서 다른 지역의 재배면적도 크게 늘었다. 특히 경북 포항의 경우 고구마 재배면적이 10배 증가했다고 한다. 정 박사의 설명이다.

“뿌리, 줄기, 잎까지 고구마는 버릴 게 없습니다. 예전엔 가격이 싸서 먹었다면, 지금은 비싸도 사먹습니다. 구매력이 강한 30~40대 주부들이 운동부족, 변비, 다이어트에 좋은 고구마를 무시할 수 없죠. 고구마가 ‘제2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고구마는 총 소비량 기준으로 13.5%인 198만t을 중도 폐기하는데, 그만큼 수확 후 관리가 중요한 작물이다. 최근 큐어링(상처 치료) 기술과 저장시설의 발달로 연중 출하가 사실상 가능해졌다. 4월에서 7월 사이 심어서 100~180일 후 캔다. 8월부터 햇고구마가 나오고 이듬해 7월까지 먹을 수 있는 시대다.

한국참다래유통사업단은 현재 국내 최대 고구마 유통기업이다. 보통 키위로 알려진 곳이지만, 고구마를 훨씬 많이 취급한다.

이들이 고구마를 시작한 것은 키위의 한계 때문이었다. 설립자인 정운천(鄭雲天) 대표(농림수산식품부장관 역임)는 2007년 1월 《톱클래스》와 인터뷰에서 고구마 가공·유통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키위가 반년 장사라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고구마 가공과 유통도 시작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 일본에 갔는데, 깨끗하게 씻어 랩으로 하나씩 싼 고구마가 일반 고구마보다 10배 넘는 가격에 팔리는 걸 보고 놀랐어요. ‘세척 고구마’의 상품화를 그때부터 고민했지요.”

한국참다래유통사업단 이승환 연구원.

고구마 세척 기술에 대해 설명하는 한국참다래유통사업단 이승환 연구원. 고구마 보관의 최적 온도는 13~15℃며 습도는 85%다.


“가공 기술 개발해야”

고구마는 물로 씻으면 금방 썩는다. 그래서 흙이 묻은 그대로 유통해 왔다. 한국참다래유통사업단은 물 대신 바이오 세척을 선택했다. 특수 과정을 거친 고구마를 크기별로 상자와 봉지에 담아 백화점과 마트에 선보였다. 고구마를 과일처럼 다룬 것이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당시 세척 연구에 참여했던 이승환(李昇桓) 연구원은 “2~3년 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며 반복 테스트를 한 결과 세척 고구마를 탄생시켰다”며 “현재 대다수 농가에서 적용하는 세척 기법이 그때 나온 개념”이라고 했다.

세척 기술과 함께 한국참다래유통사업단이 개발한 ‘환원순환농법’은 생산성 증대, 상품성(당도) 증진, 병충해 예방 등 고품질 고구마 생산에 효과적이다. 수확 후 남은 줄기나 잎을 저온 열분해하고 수액을 추출해 맞춤형 퇴비로 만드는 것이다.

이승환 연구원은 “세계 고구마 산업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생식용 시장 대신 가공상품이 좌우할 것”이라며 “생고구마 시장이 발달한데다 시세가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마 가공 기술이 걸음마 수준”이라고 했다.

고구마 가공식품들

국내에서 유통되는 고구마 가공식품들. ⓒ서경리


일본은 폭넓은 고구마 가공 산업으로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특히 페스티발로사(Festivalo社)는 고구마 산업을 세련된 식품소재와 6차 산업(1·2·3차 산업을 한번에 아우르는 개념)으로 격상시킨 기업으로 유명하다.

이 기업은 일본 정부로부터 고구마 화과자 개발을 의뢰받을 정도의 기술력을 가졌으며 유명백화점 등에 40여 개 직영점을 운영 중이다. 농업진흥청 정미남 박사는 “생산뿐 아니라 가공, 유통, 서비스까지 통합하면서 새로운 농업의 유형을 보여줬으며, 제품의 질도 독보적”이라고 했다.

“대표상품인 고구마케이크 ‘러블리’는 10년간 도쿄 하네다공항에서 판매 1위를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스튜어디스 케이크’로 불릴 정도로 전문직 여성들에게 유명했죠. 제빵·제과 분야에서 전문업체 수준의 가공기술 개발과 고객의 취향을 고려한 제품개발이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오랜 기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고구마의 숨은 잠재력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여 년 정도다. 선진국들은 육종 연구와 가공식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일본, 중국, 미국 등에선 바이오에너지 작물로, 국제기구에선 기아해결의 방법으로 관심을 쏟고 있다.

우리 국민은 식량사정이 어려웠던 1960년대 벼를 재배하기 어려운 땅에 고구마를 심어 굶주림을 해결한 경험이 있다. 쌀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먹은 게 고구마였다. 과학의 발달로 고구마의 효능과 무한한 가능성이 부각되면서 어렵던 시절에 오히려 웰빙 식사를 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신(神)의 선물’이 이제는 부유한 사람들의 체중 조절용 식사를 위한 선물이 될 날도 머지않았다.⊙

월간조선 201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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