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1월 5일 아침, 서울 세종로의 옛 부흥부(復興部) 청사 2층에 자리한 회의실에서 경제기획원 연두 순시가 있었다.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군인 출신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안종직(安鍾稷) 종합계획국장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관련 업무보고가 시작됐다.
1시간 동안 진행된 브리핑이 끝나자, 기침 소리 하나 없는 침묵이 한동안 흘렀다. 민간출신의 김유택(金裕澤) 경제기획원 장관은 불안한 표정으로 박 의장의 눈치를 살폈다. 말없이 담배에 불을 붙인 박 의장은 한참 뒤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기술 분야에는 별로 어려운 문제가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는 마당에 우리가 현재 가진 기술 수준과 기술자만으로 그것이 가능한지요. 그렇지 않다면 거기에 대한 어떤 대책이 서 있는지요. 이 점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계획 수립에 참여했던 경제전문가들과 대학교수들은 크게 당황했다. 이들에게 ‘기술’이란 ‘노동력의 일부’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기술 요인은 계획의 대상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아무도 대답을 못해 쩔쩔매던 중, 송정범(宋正範) 차관이 불쑥 일어나 “기술수급에 대해선 계획을 별도로 수립하겠다”는 답변으로 고비를 넘겼다. ‘기술수급’은 그가 임기응변으로 만들어낸 용어였다.
전상근(全相根) 전(前) 과학기술처 종합기획실장이 지난 9월 초 출판된 <과학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이란 책에서 밝힌 48년 전 회의 모습이다. 이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짧은 질문은 후에 한국 과학기술 근대화의 초석(礎石)이 됐다. 이 질문이 나온 지 4개월 반 뒤인 5월 21일 제1차 기술진흥 5개년계획이 수립됐고, 4년 후 미국의 원조를 받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설립됐다. 1967년엔 개발도상국 최초로 과학기술 전담 부서(과학기술처)가 신설됐다.
과학대통령 박정희와 과기부 없앤 이명박 정부
정확히 46년 후인 2008년 1월 5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기존의 교육인적자원부와 과학기술부(과기부)를 통합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정부조직개편안을 이명박(李明博) 당시 당선자에게 1차 보고했다. ‘과학입국 기술자립’(科學立國 技術自立)의 기치 아래 조국(祖國) 근대화를 견인했던 과학기술 분야의 한 축인 과기부가 해체되는 순간이었다. 박정희의 결단은 부국(富國)을 키워냈고, 이명박 정부의 ‘무관심’은 혼란을 불러왔다.
정부 출범 후 과학기술계의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연일 과학기술 관련 단체의 반대성명이 나오는가 하면, “500만 과학기술인이 그에 상응하는 의사표명을 할 것”이란 ‘표(票) 심판론’까지 나왔다.
채영복(蔡永福) 전(前) 과학기술부 장관은 2008년 2월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지금은 과학과 기술이 융합돼 분리할 수 없는 시대다. 정치나 행정을 맡은 사람들은 1970년대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다”고 했다. 김정구(金廷九)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는 “과학기술계의 문제제기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국가발전의 밑그림이 잘못됐기 때문이다”고 성토했다.
과학기술계의 반발이 계속되자, 이명박 정부는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 초대 장관에 과학기술계 인사인 김도연(金道然) 서울대 공대 교수를 임명했다. 김도연 당시 장관은 “과학기술계의 우려를 잘 아는 만큼 과학기술 분야에 더욱 신경 쓰겠다”며 과학기술계의 우려를 적극 차단하고 나섰다.
하지만 4개월 후 시행된 ‘7ㆍ7개각’에서 김 장관은 물러났고, 후임은 행정학 전공의 안병만(安秉萬) 전 한국외국어대 총장이 발탁됐다. ‘이공계 출신 교과부 장관’이란 상징성마저 잃은 과학기술계는 다시 한 번 자존심을 구겼다. 정부 출범 후 R&D 예산이 매년 평균 10% 이상 증가하는 등 양적 성장은 이뤄졌지만, 비효율적 예산 배분과 과학기술 컨트롤 타워 부재(不在)가 국가 과학기술 발전의 발목을 잡았다.
이명박 정부 이전까지 부총리급이던 과학기술계의 수장은 정부조직 개편과 개각 이후 차관급으로 ‘전락’했다.
‘과학 50년 大計’
2년 반 동안 ‘찬밥신세’였던 과학기술계가 최근 큰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비상설 대통령 자문기구인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이하 국과위)가 예산권을 갖는 정부기구로 격상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과학기술기본법 개정안’이 9월 현재 정부 관련 부처에서 검토 중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정권 출범 당시 해체한 과기부를 부활시키는 셈이다.
정부안의 토대는 ‘과학기술 출연연 발전 민간위원회(이하 민간위)’가 지난 7월 청와대와 정부에 제출한 ‘새로운 국가과학기술시스템 구축과 출연연 발전방안’ 보고서 내용을 근간으로 한다. 언론은 새로운 국과위의 위원장(장관급)으로 민간위를 이끈 윤종용(尹鍾龍)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을 지목하고 있다.
민간위 발전방안의 핵심은 현재 부처별로 분산된 국가연구개발(R&D) 사업 전체에 대한 전략수립, 기획, 예산배분, 평가 등을 일원화된 지배구조로 개편하는 것이다. 연간 13조7000억원(2010년 기준) 규모의 관련 예산이 국과위에 의해 결정된다. 민간위는 이를 50년 앞을 내다보고 계획한 획기적 거버넌스(governanceㆍ국정관리체계)라고 강조했다.
현재 교과부와 지경부 산하에 흩어져 있는 26개의 출연연구기관과 기타 공공연구기관을 국과위 산하로 통합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출연연구기관이 통합돼 단일법인화가 이뤄질 경우 개별 연구원 및 부처 간 칸막이가 사라져 융ㆍ복합 연구에 활기를 되찾을 수 있고, 조직 유연성을 극대화해 급변하는 기술변화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고 한다.
과학기술계는 일단 환영의 뜻을 보였다. ‘바른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과실연)의 민경찬(閔庚燦) 상임대표(연세대 교수)는 “정부 출범 초기 과기부가 해체되면서 ‘컨트롤 타워의 부재’가 과학기술계의 가장 큰 불만이었다”면서 “출연연 단일 법인화 과정에서 얼마나 자율성을 줄 것인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겠지만, 일단 정부가 과학기술계의 숙원을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에 크게 환영한다”고 밝혔다.
국회 교육과학위 소속 임해규(林亥圭) 의원은 경영학의 대가인 피터 드러커의 “어떤 조직이든 40~50년이 되면 조직 전반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 예전의 정책은 조직에 맞지 않게 되고 조직의 행동규범 역시 옛것이 되기 때문이다”란 말을 인용하며 “기존의 정부운영방식과는 전혀 다른 국가연구개발위원회 신설은 한국의 선진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정통부는 방통委로, 과기부는 국과委로 부활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내세웠던 ‘실용적 작은 정부’가 결국 실패했다는 비판은 면하기 어렵다. 출범 초기 인수위를 경제학자들이 주도하면서 ‘인풋(input)과 아웃풋(output)’이란 경제논리로 과학기술행정을 재단했고, 이명박 대통령의 비즈니스 중시 마인드가 합쳐지면서 결국 과기부의 해체를 불러왔다.
함께 해체됐던 정보통신부는 방송통신위원회(위원장 최시중)라는 거대 행정위원회로 부활했다. 인수위에서 해체한 두 정부부처가 3년도 안돼 모두 부활하는 셈이다.
지난 2년 반 동안 한국이 국내 갈등을 겪는 사이, 경쟁국들은 과학기술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상희(李祥羲) 국립과천과학관장(전 과학기술처 장관)은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과학 자문 드림팀’, 일본은 지적재산입국(知的財産立國), 중국은 과기흥무(科技興貿ㆍ과학기술을 수출해 무역을 일으킴) 등 과학기술 관련 정책을 국가 부흥의 주요 전략으로 삼았다”면서 “성과가 즉시 나타나지 않는 R&D 분야 정책의 특성으로 볼 때, 지난 2년 반 사이 벌어진 간극은 수년 후 우리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했다.
개인의 풍족한 삶은 물론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도 과학기술 발전은 필수다. 지난 3월 한반도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긴장을 불러온 천안함 폭침(爆沈) 사건은 결국 윤덕용(尹德龍) 민간공동조사단장(KAIST 신소재공학과 명예교수) 등 과학자들에 의해 진상이 규명됐다. 2년 전 이명박 정부를 가장 큰 위기로 몰아넣었던 ‘광우병 촛불시위’도 논란의 쟁점은 결국 생명과학이었다. 최근 국제시장의 가장 큰 이슈로 떠오른 스마트폰 열풍도 결국 각국의 기초과학의 영역에서 승패가 갈린다.
추석 후 정부안이 공식 발표된 후에도 출연연구기관 통폐합과 R&D 예산권 편성 등 세부 내용을 두고 논란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부가 2년 반 전 자신의 실패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한국의 ‘과학기술 50년 대계’를 제대로 설계할 수 있을지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월간조선 2010년 10월호 / <기자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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